부활

누구나 이름은 들어봤을 소설가, 대작 ’안나 카레니나’의 저자, 대문호라는 명칭이 어울리는 작가. 바로 레프 톨스토이다. 이토록 흥미진진하게 읽은 고전은 오랜만이었다. 현대의 소설들과 비교해도 서사의 몰입감이 엄청나다.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뒷이야기가 궁금해 손에서 놓기가 힘들었다. 7~800쪽에 달하는 분량이 아쉬울 정도였다.(역시 톨스토이는 톨스토이다.)

젊었을 적, 순수함과 사회의 부조리를 개선하겠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던 네흘류도프 공작은 나이를 먹고 군생활을 하면서 점점 상류사회의 사치와 허영, 특권의식에 물들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재판의 배심원으로 참가하게 된 그는 자신의 어릴 적 첫사랑, 마슬로바를 만난다. 과거, 순수한 첫사랑으로 시작했으나 시간이 지나며 욕망을 참지 못한 그는 으레 보아온 귀족들이 그러했듯 자신보다 사회적 위치가 낮은 마슬로바와 밤을 보내고 난 후 보상으로 100 루블을 주고 그녀를 떠났다. 그 날 이후 네흘류도프의 아이를 임신한 마슬로바는 진정한 사랑이라 생각했던 네흘류도프를 잃고 배신감을 느낀 데다 아이까지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는 바람에 점점 타락의 길로 빠져들어 사창가를 전전하며 몸을 팔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한 상인의 돈을 노리고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아 피고로 재판에 서게 된 것이다. 마슬로바를 보며 어릴 적 자신의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모습을 떠올린 네흘류도프는 마슬로바가 타락하게 된 원인이 자신의 무책임하고 비인간적인 행동 때문이었던 것을 깨닫고 뉘우치며 마슬로바를 구하려 하지만 배심원 판결의 사소한 실수 하나로 죄가 없는 마슬로바는 징역형을 받게 된다.

마슬로바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그녀를 구하려 동분서주하는 네흘류도프. 그는 죄가 없는 마슬로바가 몸을 팔고 이런 재판에 연루되기까지 한 것이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 판단하고 마슬로바가 징역을 살게 되는 시베리아까지 따라가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녀가 동의한다면 그녀를 돕기 위해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그 과정에서 네흘류도프는 마슬로바가 있는 교도소에 계속해서 면회를 가게 되는데 교도소에 있는 죄수들의 모습에서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교도소장과 교도보들에게 가축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있는 그들을 보며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빈곤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죄수들과 사치와 허영을 누리며 하층민들을 벌레처럼 생각하는 상류계급들, 그리고 부패한 관리들. 네흘류도프는 이 사회가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 있다고 느끼고 하층민들과 죄수들을 도우며 상류사회의 끔찍한 모순과 부패를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을 거친 네흘류도프가 진정하고 진실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깨달으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소설의 제목 ‘부활’이 의미하는 것은 명확하다. 상류사회의 특권의식과 부, 명예, 사치, 허영에 가려져 있던 눈을 뜬 네흘류도프가 하층민들의 삶과 그 속에 담긴 처절함, 부당함,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는 환경, 하루하루 먹을 것과 목숨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를 목격하며 진정하고 진실된 영혼을 가진 인간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바로 ‘부활’이다. 이 작품이 훌륭한 이유는 네흘류도프가 진정한 부활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에서 느끼는 갈등과 고뇌,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죄책감, 쉬이 떨쳐내지 못하는 이기심에 대한 서술과 묘사를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생생하게 그렸고 그 속에 당시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 추악함을 빈틈없이 담아내며 사회 문제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문제의식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네흘류도프는 끊임없이 고뇌한다. 내면의 영혼이 외치는 목소리와 하층민들의 땀과 피 위에 세워진 상류사회의 안락함 사이에서. 하층민들이 겪는 부조리한 고난과 고통만 외면한다면 네흘류도프는 편하게 안락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는 소설 중간중간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내가 굳이 이것까지 포기해가며 사회를 바꿔야 할까, 나 하나 이런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하는 생각들에 유혹당한다. 그에 넘어가기도 하고 극복하기도 하면서 네흘류도프는 점점 부활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 소설은 네흘류도프를 이상적인 선한 인물, 영웅적인 인물로 그리지 않는다. 악인도, 선인도 아닌 평범한 인간인 우리들과 다를 바 없이 끝없이 갈등하는 인물로 묘사된 그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고뇌와 가치관의 변화를 보여줌으로써 이 소설은 평범한 인간도 얼마든지 진실된 인간으로의 부활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보이는 당시 사회의 민낯은 이 소설의 격을 한층 더 끌어올린다. 가감 없이 적나라하게 묘사되는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 상류계급들의 겉만 번지르르한 인간답지 못한 행태, 관리들의 부패와 인간성이 사라진 법 제도, 농민들을 착취하는 토지제도 등은 깨끗한 거울처럼 당시 사회의 모습을 선명하게 비춘다. 그 생생한 묘사들을 보고 있으면 인간이 그래도 이만큼 진보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안심이 되는 부분도 있고, 작금의 현실과 맞닿아 있어 흠칫하게 되는 부분도 있다. ‘부활’의 놀라운 점은 문제의식 제기와 비판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는 점이다. 톨스토이는 네흘류도프의 입을 통해 사회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토지 사유 문제에 대해 어떤 식으로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주고 어떻게 운영해나가야 하는지 방안을 제시하고 법 제도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며 인간이 인간을 재판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자신의 의견과 함께 관료 제도를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이야기한다. 개인의 선 추구와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과 문제 제기, 그에 대한 해결 및 개선 방안까지 한 편의 소설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다.

그렇다고 소설 자체의 재미가 떨어지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앞에도 말했듯 지금까지 읽은 고전 중에 가장 재미있었고 한 번 책을 잡으면 손에서 놓기 힘들 정도였다. 마슬로바와 네흘류도프의 사랑 이야기와 그 내면 묘사도 뛰어났고 재판의 결론은 어떻게 날지, 네흘류도프가 돕기로 한 죄수들의 억울한 사연들은 어떻게 해결될지, 결국 마슬로바와 네흘류도프가 이어지는지 아닌지, 궁금함을 계속 불러일으킨다. 네흘류도프의 서사와 함께 여주인공인 마슬로바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몸을 팔던 상황에서 네흘류도프의 변화된 모습의 영향으로 예전의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내면을 찾아가는 이야기, 즉 마슬로바가 ‘부활’해가는 줄기를 놓치지 않은 것도 훌륭했다.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꼽자면 결말이다. 네흘류도프가 완전히 부활하는 결말 부분에서 성경을 읽고 그 속에 모든 것이 다 있다고 말하며 종교적 깨달음과 부활을 이루는 것처럼 끝나는 결말은 많이 아쉬웠다. 네흘류도프 개인의 끊임없는 성찰과 자기반성, 노력이 종교로 인해 퇴색된 듯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는 종교의 영향이 매우 큰 시대였으니 어쩔 수 없지만 현대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 사실이다.(특정 종교 비하는 아닙니다. 단지 개인의 숭고한 노력과 자기반성이 종교의 그늘에 가려져 버린 듯한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주절주절 늘어놨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대단한 작품이다. 문학적 의미와 가치면에서는 물론이고 소설적 재미의 완성도 면도 마찬가지다. 100년이 넘게 지난 작품이 현대의 독자에게 이 정도로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집중시킨다는 것만 봐도 흠잡을 곳이 없다. 책의 두께에 겁먹어 이 작품을 놓치는 일이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