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와 단테의 이탈리아

야고보서 1:17 중 –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p183

그 회전하는 빛 속에 있던 사랑이 말했다.

“하느님의 빛이 나를 향하시고

나를 둘러싼 빛을 관통하신다.

회전하는 빛으로 신을 묘사한 야고보서의 구절을 좋아했고 지금은 가장 통찰력있는 구절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번편에선 연관 시구가 많아서 그런지 쓸데없이 예전 생각도 나고… 괜히 이게 뭐하고 사는 건가 싶기도 하고… 이번 주 로또도 사러 가야하는데…

p289

말함은 그런 시각 앞에서는 실패한다.

기억은 그러한 한없음 앞에서 굴복한다.

신곡은 절반은 신학, 절반은 이탈리아 피렌체 근방의 토속성을 띠고 있음이 분명한데 서구중심적인, 일종의 사대주의에 기인한 세계성으로 오인하는 작품해설까지 접하니 아리까리 하다.

단테 당대의 신학(성경 말고)이 만신주의(그리스)와 엮여 있고, 라틴어 성경 해석의 자의성이 문자주의와도 배치된 고백(p289)을 낳고 있는데, 이런 중세 신학과 뒤섞인 피렌체의 지역성, 베아트리체를 신격화한 반역을 그저 어떤 인류 문명의 보편성으로 추앙해서 ‘우와우와’ 받아들이기에는 번거로운… 원효대사 해골물 정서가 일어선다.

물론 타락한 교황 추기경 엿먹으라고 지옥으로 보내거나 인물들에 대한 비평, 비라틴어 문학으로 ‘읽는 시’로서의 가치를 학문적으로 논한다면 다른 평이나 찬사가 뒤따르겠지만…

전 송강 정철도 싫고 한시 같은 것도 벨루고… 차라리 서유기나 금, 금병매…

단테는 읽음이 아닌 본다는 것의 내세적 교훈을 지향하지만 요한복음 1:1이 증거하는 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는고로… 개신교 교단에서 루터, 칼뱅의 혁명 줄기를 이은 소자는 단테의 <코메디아>를 읽는데 자꾸 걸림돌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