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 대하여>는 요양 보호사로 일하는 엄마와 그녀의 딸, 그리고 딸의 동성 연인에 관한 이야기라고 소개되어 있지만, 제목과 소개 글의 내용은 요약에 불과하다. 사실 이 책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다. 엄마. 누구나 살면서 한 번 이상 발음해보는, 그 정감 가는 두 글자. 태어나서 맨 먼저 들었을 목소리의 주인. 많은 이들이 가장 처음 발음하게 되는 그 한 단어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유아기를 지나 유년기. 또 청소년기가 빠르게 흘러 성인이 되고, 내가 누군가의 엄마, 또는 아빠가 된다 해도 내 삶에 흔들림 없는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그 사람을, 사실 우리는 단 한 번이라도 정말로 궁금해 본 적이 있던가.
책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모두 세상 모서리에 서 있는 이들이다. 그런 모퉁이를 떠도는 건 보통 다수에게 이해받지 못한 소수들이다. 이를테면 가족 하나 없어 요양원에 머무는 치매 노인이나 동성애자와 같은. <딸에 대하여>는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운 기성세대 어머니의 눈을 통해 그런 소수자들을 사회가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사실 이 책의 주제는 동성애도, 모성도, 노년도 아니다. 책은 내내 이해하지 못하는 자와 이해받지 못하는 자를 보여준다. 결국, 모든 문제는 이해관계 속에 발생한다는 걸 보여준다. 나는 책을 읽으며, 누군가에게는 당연하게, 또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 일이 누군가에겐 죽어도 용납되지 못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뚜렷한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는 ‘이해’라는 분야는 너무도 어렵고, 답답한 논쟁이 된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며,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죽거나 상처 입기도 한다.
엄마는 딸 애를 너무 많이 교육 한 탓에, 너무 똑똑해져 버려서, 불필요한 것까지 알아버렸다고. 어딘가 엇나가 버렸다고. 바로잡을 시기를 놓쳐버린 거라고 생각한다. 동성애에 대한 편견이 그나마 무뎌진 현재 사회에 저런 식의 대놓고 불쾌한 반응은 이제 유머로도 소비되지 못하지만, 책을 읽는 독자들은 어머니를 마냥 힐난할 수 없을 거다.
나는 중년ㅡ노년의 삶에 대해 몇 번 생각해 본 적 있다. 미래에 닥칠 내 노후라기보다는, 세상 모든 노인의 삶 말이다. 사인과는 상관없이, 요즘 시대에 대부분 노인은 도시에서 죽는다. 기억을 일부분, 혹은 전부, 혹은 어느 하나 간직하지 못한 채 눈을 감는 사람들. 변화에 발맞추기 어려운 이들. 현재나 미래보단 과거에 머문 이들. 자꾸만 먼 먼 어느 시절로 돌아가고야 마는 이들.
시간도, 죽음도, 시대도 어느 하나 나이든 이들이 따라잡기엔 너무나 빠르고 신속히 변해간다. ‘나 무릎이 아파. 조금만 기다려 줘.’하고 뒤처지는 사람은 버려지고, 그저 그렇게 모든 것이 흐른다.
요리도 잘하고 청소도 잘하는 그 애는 왜 결혼을 하지 않는 걸까.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엄마가 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일. 그런 의미 있고 대견한 일을 할 생각을 하지 않고 무의미하게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걸까.
ㅡ61p
덥지도 않은 모양이에요. 이 땡볕에 종일 저러고 서 있는 게. 하기요 요즘엔 어디나 저런 사람들 천지잖아요. 얼마 전엔 구청에 갔더니 그 앞도 난리더라고요. 다들 무슨 불평, 불만이 그렇게 많은지. 우는소리 하면 다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예요. 다들 감사하게 생각할 줄은 모르고.
ㅡ94p
책에서는 이런 방식의 폭력이 계속 등장한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이에게 매달 돈을 보내주었던 젠과, 딸이 동성애자인 이유,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며 자책하는 엄마처럼. 모든 것에 가치와 의미를 매기려고 한다매기려고한다. 타인을 위해 헌신한다는 점에서 젠과 딸은 겹쳐 보이지만, 그렇다고 둘이 서로에게 깊게 공감하고, 동지애를 느끼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해’라는 단어가 의외로 단순한 말이라 생각한다. 그냥 우리는 여기 있어요. 여기 있다고요. 그래, 너희가 여기 있구나. 그렇게 알아주는 것. 저희가 원하는 건 그뿐이에요. 라는 책 속 누군가의 말처럼, 그저 ‘존재’를 인식하고, 부정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래. 그럼 소꿉장난이 아니라는 걸 어디 한번 말해 봐라. 너희가 가족이 될 수 있어? 어떻게 될 수 있어? 너희가 혼인 신고를 할 수 있어? 자식을 낳을 수 있어?
ㅡ107p
이 또한 너무 진부하고 낡은 논쟁이다. 꼭 피가 섞여야만 가족이 아니라는 것. 혼인 신고나 자식 같은 법적 연결고리 없이도 충분히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그걸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어머니가 그 애를 받아들이고,딸을 이해하고, 딸은 어머니를 이해하고. 책에선 아슬아슬한 경계를 허물어 서로를 보듬는 결말은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한 사람의 가치와 존재를 어느 정도 인식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이 관계가 유지되리라 믿는다.
책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또 이 책을 읽는 다른 사람들은 어떤 반응일까.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받고자만 하는 딸을 질책할까. 하지만 그것도 다 모를 일이다. 어머니가 ‘좋았던 시절’이라 칭하는, 엄마가 세상 전부라고 알던, 엄마의 말 한마디가 그 날 하루를 좌지우지하던 때는 딸의 입장에선 그리 행복하고 이상적인 과거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정말로 이 책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충돌? 소수자와 화합해야 한다는 교훈? 어쩌면 그런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문득 들었던 생각은, ‘어머니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딸의 시점에서 책을 펴낸다면, 아마 이 책 두께의 반절도 넘기지 못할 거란 확신이다.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다 알잖아. 어쩜. 이럴 수는 없어. (…) 세상에. 그런데도 이제 와서 쓰레기통에 처넣듯이 보내 버리겠다니. 우리라고 뭐 다를 거 같아? 우린 영원히 저런 침대에 안 누워도 될 거 같아?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정신 좀 차려. 정신을 좀 차리라고.
ㅡ130p
책의 후반부, 마침내 모든 게 충돌하던 순간이다. 어쩌면 그녀가, 그녀의 딸이, 그 애가. 또는 우리 모두가 하나쯤 품고 살아야 할 한이 아닐까. 어떤 삶의 무게란‘세상일’일 때는 결코 깨닫지 못하다, 코앞까지 닥치고 나서야 애원하게 된다. 정신 좀 차려. 정신을 좀 차리라고. 그녀가 정말로 이 말을 전하고 싶었던 건 과연 누구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