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인간으로 갱생시키는 게 여자의 일이라면

소설의 바탕이 되는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의 입주 조건은 이렇다.

이미 자녀가 1인 이상 있을 것.

인구 생산 능력이 증명된 만 42세 미만의 한국 국적을 지닌 이성 부부일 것.

자녀를 2인 이상 둔 부부나 둘 중 한 사람만 직장에 다니는 경우 우대 조건에 포함되며

입주 예정인 유자녀 부부는 자녀를 최소 셋 이상 갖도록 노력한다는 자필 서약서를 작성해야 함.

애초에 공동 주택을 건립한 취지가 더는 바닥이 없을 정도로 가파르게 깎여 내려온 출생률인 만큼, 입주 조건 역시 ‘출산 능력’에 집중되고, 임신과 육아에 얼마나 헌신할 수 있는가를 선별해낸다. 게다가 다소 크리티컬 하다 느낄 수 있는 자필 서약서까지 작성해야 비로소 공동 주택 속 열두 가정의 일원이 될 수 있다. 저출생 비율에 별다른 개선점을 주지 못하면 언제든지 폐기될 수 있고, 증빙 서류 준비 또한 만만치 않음에도 ‘꿈미래실험공동주택’에 참여한 커플의 수는 수두룩했다. 그중 대개가, 아니 거의 모든 이들이 서울 중심가에서 버티기 힘든 전세금에 이유를 두었을 것이다. 이곳에 네 번째로 입주한 요진네 가족 또한 마찬가지다.

견고해 보이는 네 이웃의 식탁 아래에서 폭로되는 공동체의 허위, 돌봄 노동의 허무.

책의 줄거리 대신 뒤표지에 쓰여 있는 소개 글에 사용된 단어들은 내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폭로’ ‘허위’ ‘돌봄 노동’ ‘허무’ 등이 그러하다. 현재 이 투박한 표현에 속한 이들에게조차 다소 낯선 말들일 수 있다. 그 어디보다 안락하고 견고한 지붕 아래이며, 부엌과 식탁과 그곳을 부유하는 식기들 아래의 실체이다. 자진해서 실험체가 되고야 만 공동체가 어떻게 내부에서 무너지는지. 허위와 실상 속에서 무엇이 그들을 허무로 끌어내리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식탁 아래 요구되는 융통성

<네 이웃의 식탁>은 꿈미래실험공동주택에 가장 먼저 입주한 홍단희-신재강 부부, 그리고 차례로 입주한 손상낙-조효내 부부, 강교원-고여산 부부, 서요진-전은오 부부 이렇게 네 가구가 함께 거주하게 되며 시작된다. 이 견고한 식탁 아래 처음으로 드러나는 갈등은 공동 주택의 리더격이 되는 홍단희와 서요진네 부부의 입주 환영식에 저 혼자 홀랑 빠져있던 조효내의 대립이다.

단희는 프리랜서라는 직업을 명분으로 밤샘 작업을 하고 주로 아침에 이루어지는 공동체 생활에 모습을 잘 내비치지 않는 효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러면서 육아와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적당한’ 융통성을 들먹인다. 여기서 중요한 건, 결코 소설 속 단 회의 모습이 유난스럽게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희가 효내에게 요구하는 건 예의 함께 지내다 보면 느낄 수 있는 사소한 오해나 괘씸함 같은 걸 유연하게 풀어내는 것. 받은 호의에 감사함을 표하고 그에 응당한 보답을 하는 것 정도이다. 심지어 초반까지는 ‘저정도’ 융통성조차 발휘하지 못하는 효내의 행동이 답답하고 짜증 나기 까기 한다.

하지만 효내에겐 엄연한 직업이 있고, 지금까지 프리랜서로서 최대한으로 끌어온 경력이 있다. 단희부터 남편인 상낙, 친가까지 그녀의 일을 하등 시 하는 외부로부터 악착같이 본인의 일을 지켜내고 있다. 일에 대한 프라이드나 애정과는 별개로, 가정에 ‘소속’된 여성에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고 있지 않나.

ㅡ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알아? 당신 말대로라면 낮 동안낮동안 결국 애 하나만 보고 낑낑대면 그만인 것을, 여러 명이서 여러 애를 보며 더욱 진을 빼자는 얘기가 되는데? 내가 무슨…….

강철인 줄 아니, 소리가 성대 끄트머리에 걸려 흔들리다 흐무러졌다. (93p)

정가가 12만 원이든 7만 원이든 일단 3만 원을 무턱대고 부르고 보는 강교원의 사고 리듬은 분명 은오의 이해 바깥에 놓여 있었다. 아이를 위한다는 구실로 일상에서 가벼운 것부터 하나둘씩 무리수를 두다 결국 수치라는 걸 모르게 되고 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걸까……. (148p)

당장 마지막으로 입주한 서요진-전은오네 부부만 봐도 그렇다. 엄연히 아침 일찍 일어나 차를 끌고 시내까지 출근하는 사람과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이가 구분되어 있음에도, 누가 더 집 아래 일어난 일에 능숙한지 쉽게 알 수 있다. 이것이 ‘어린아이에게는 엄마가 필요하다’는 말로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일까?

그렇다고 말하기엔 우리는 한국에서 엄마들이 융통성을 발휘하는 순간, 그들이 뭐라고 불리는지 너무 많이 봐왔다. 맘충 또는 극성 엄마, 거지 맘이라는 칭호와 직장과 육아가 완벽히 분리되지 못한 여성은 어이없게도 공존한다.

그건 겨우 ‘예정에 없던 대의’(90p) 라는 온순한 말로 포장되거나 혀끝에만 맴돌다 사라진다.

개를 인간으로 갱생시키는 게 여자의 일이라면

그야말로 지금까지 ‘고쳐서 써먹’었지. 아직 흡족하달 정도는 아니나 일이 년 새 신재강, 많이 인간 됐다. (77p)

융통성과 융화의 대모쯤 되는 단희가 처음 재강에게 아이를 맡겼을 떠올리며 한 독백이다. 요진이 입주하고서부터 재강이 보인 만행만 보아도 저 말의 오류를 알 수 있지만, 애초에 인간에게 인간이 되었다며 흡족해하는 현상 자체가 기이하다. 여자들이 사회에서 개돼지 또는 벌레로 불린다면, 남성들은 주택의 문을 넘는 순간 다리를 잃는다. 시력도 잃고 청각도 잃고 신이 나서 자부하던 대단한 우월함도 잃어버리고 만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앞뒤에서 으레 찾아볼 수 있을 만한 작가의 말이나 추천사, 해설 등이 쓰인 페이지가 없던 것이다. 나는 이마저도 오늘의 젊은 작가, 네 이웃의 식탁에 어울리는 부분이라 생각했다. 이 소설에 담긴 인물들의 독백과 말 하나하나가 곧 현대 사회를 아우르는 해설이고, 작가가 하고팠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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