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이 제목보다 ‘상실의 시대’가 좋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 생각에는 작가의 의도로 보나 비틀즈 음악에 친숙한 세대에서 보나 이 제목이 더 적절한 듯하다. 노르웨이의 숲에서는 나오코가 자살한 장소, 그리고 수풀()의 한자 상형에서 연상되는 삼각관계 뿐 아니라 나는 비틀즈가 이 곡을 작곡할 때 레논이 회상한 남자를 방으로 꼬시고나서 도망쳐버리는 남자 애간장 태우는 cock-tease에게서 (Norwegian wood가 knowing she would의 언어유희라고 한다) 성적 삽입을 거부하는 나오코가 연상되기도 하며 처음 읽을 때는 나오코가 나를 사랑하지도 않았던 것이라고 읽고서 John Keats의 La Belle Dame Sans Merci처럼 나오코가 무자비한 여자처럼 얼핏 비쳐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곡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이국적 민요같은 이 노래에서는 우울한 느낌보다는 뭔가 밝고 야릇한 분위기가 흘렀는데도 그걸 슬프게 받아들인 나오코가 기즈키나 와타나베와의 관계를 거부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숨겨져있고 결국 그녀가 this bird has flown처럼 곁을 떠나게 될 것을 암시한다. 몸이 아픈 사람에게는 달콤한 과일도 쓰게 느껴지듯.. 마음이 아픈 사람에게는 밝은 노래도 서글프게 느껴진 것 같다..

 

실은 이 소설을 처음 읽었던 중학생 때 나는 이미 무라카미 류나 장정일 소설을 읽었기 때문에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이 야하다는 생각도 안 들었고 아직 사랑을 해본적도 없어서 그냥 재미있게 읽은 정도였고 그의 좀더 초현실적인 ‘댄스댄스댄스’나 ‘양을 쫓는 모험’을 더 좋아했다.

 

하지만 오히려 이번에 북클럽을 통해 다시 읽게 되면서 그 사이에 내가 얼마나 변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연애를 직접 해 본 후 더 와닿는 책이라는데 단지 연애 경험 때문이 아니다. 물론, 연애경험도 나를 변하게 한 것 중 하나다. 나는 솔직히 사차원이고 제멋대로인 면도 없지 않아서 미도리나 나가사와같은 면도 있었고 후회가 되는 부분이지만 나오코같은 면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가사와의 무분별한 육체관계나 미도리의 딸기 쇼트케이크 집어던지는 이야기가 이기적인 갑질이라고 욕하지만 내 생각에는 나오코도 만만치 않게 이기적이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미도리가 더 매력적이고 공감가며 나오코가 싫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나오코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때 이해 불가능했고 전혀 현실감이 없던 나오코가 이제는 과거의 내 모습이 비춰지고 빠져버리는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우물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오코의 이름은 直者 (직자)

곧을 직 자가 들어가있는 만큼 뭔가 정갈하고 곧바른 이미지다.

실제로 그녀는 단어 하나하나에 신경 쓰다 못해 말수도 적고 편지도 잘 못 쓴다.

뭔가 하나라도 자신이 의미하는 바와 다를까봐 겁먹는 그녀는 입원하고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조금씩 비뚤어져있는 것이라고 배우고나서도 자신이 비정상이라고 잘못되었다고 자기비하와 자책을 멈추지 못한다.

“그건 올바르지 못한 일이야, 너에게나 나에게.” – p. 17

“그는 우리가 여기에서 생활하는 것은 뒤틀림을 교정하려는 게 아니라 그 뒤틀림에 익숙해지기 위한 거라고 했어.”-p. 155

 

그리고 누군가의 짐이 되기 싫다고 자꾸 말하고 와타나베에게

“그러니까 누군가가 누군가를 영원히 지켜준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잖아.”-p.17

라고 대답했 듯이 지나치게 민폐나 결례를 두려워하는 듯하면서도 가장 잔인하고 부담이 되는 말들을 뱉어내기도 하는 이중적인 면을 보인다.

“저기, 그때 왜 나랑 잤던 거야? 나를 왜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던거야?”-p.19 “나를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존재하고 이렇게 네 곁에 있었다는 걸 언제까지나 기억해줄래?”-p. 20

 

우수한 언니를 두어서 자신은 우수하진 못해도 귀여움받는 아이로 커야지 생각했는데

그 우수하고 동경했던 언니도 ‘자살의 혈통?’이랄지 ‘나쁜 피’를 물려받은 듯하고

자신에게도 있는게 아닌가 싶고

사랑스러워야 하는데 정작 사랑하는 기즈키에게 ‘완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는 몸이었고 그런 상태에서 그를 영원히 잃어버리고 그녀는 계속 자책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나도 너무나 높은 이상적 기준을 쌓아놓고 그 기준에서 벗어난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서 좌절하고 우울증에 빠진 적이 많다. 그 당시 상담해주신 선생님도 모두가 이상의 잣대에서 벗어났는데 나는 그저 그것을 더 의식하고 나 자신에 대해 더 엄격한 것이라고 하며 스스로를 용서하고 너그럽게 수용하는 것을 익히게 했다.

물론 그게 이성으로는 수용하지만 감정은 그리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나오코가 와타나베에게 왜 그렇게 쉽게 자신이 변할 수 있는지 울부짖는 것은 ‘왜 그냥 기분 좋은 생각만 하고 행복해지겠다고 마음 먹지 못하냐’는 남편에게 반문한 것과 흡사했다.

“어깨에서 힘을 빼면 몸이 가벼워진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 그런 말 들어본들 아무 소용없어. 무슨 소린지 알겠어? 만일 내가 지금 어깨에서 힘을 빼면, 나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아. 난 옛날부터 이런 식으로 살아왔고, 지금도 이런 식으로밖에 살아갈 수 없는 거야. 한번 힘을 빼고 나면 절대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해. 그걸 왜 몰라?” -p. 18

 

나를 헐뜯고 비난하는 내 안의 목소리들은 남의 목소리들보다 더 차단하기 힘든 것이다.

그리고 나도 밑바닥에 빠진 나에게 나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맹세하는 남편에게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어.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 뿐이야’하고 그를 뿌리치면서도 결국 그에게 기대었다.

나는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들춰내는 듯 해서 더욱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나오코를  그리고 과거의 나를 이해하고 용서하게 된 것 같다.

 

또 하나 바뀐 나의 감상은 와타나베..

Mrs. Watanabe가 미국의 Smith나 중국의 왕씨만큼 흔한 성이어서 각국의 개인 투자자를 뜻하는 경제 용어에도 쓰이듯이 평범한 남자 와타나베..

그의 이름은 토오루 (통할 통)여서 그럴까 키즈키와 나오코, 하쓰미와 나가사와 사이, 그리고 나중에는 레이코와 나오코 사이의 균형과 소통을 담당해주는 다리나 medium같은 인물이 되는 듯 하다.

 

이전에는 너무 이런 저런 생각이 많고 미도리와 나오코 사이에서 방황하고

이도 저도 못하는 이 와타나베가 무지 답답하고 짜증났는데

지금은 이해가 간다.

그만큼 내 자신도 특별함과 거리가 먼 평범한 인간일 수 밖에 없고

인생이 하나로 정해진 것이 아닌 불확실의 연속인 것을 피부로 느낀 것인가.

레이코 말대로 ‘하늘도 푸르고 호수도 아름답다’고, 인생은 비스킷 깡통처럼 한정지을 수 없는 다양함과 예측불가능한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으니 우리는 연륜이 쌓이며 자기 자신 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너그러워지는 걸까. 내 자신도 특별함과 거리가 먼 평범한 인간이고 인생은 불확실의 연속임을 피부로 느끼게 되는 걸까.

 

이 와타나베와 나오코에 대한 나의 태도의 변화는

나의 이상과 경직된 사고방식이 무너지면서 변했는데

20대에 나는 실존주의 책들을 읽고서도 많은 사고의 전환을 겪었다.

 

와타나베가 미도리 아버지에게 얘기한 Deus ex machina의 언급이

중학생 때는 아직 안 읽었던 Euripides와 기타 희랍비극들, 그리고 니체의 Birth of a Tragedy를 읽고 나서 새롭게 와닿았고 이는 이 책의 실존주의적 이해로 이어졌다.

Euripides의 비극에서 자주 나오는 Deus ex machina는 신의 부자연스러운 개입을 현실에서 바라는 알량하고 헛된 기대를 지금 우리는 비웃는다. 책에서 나온 Great Gatsby에서도 비춰지듯이 우리는 그런 기대나 기존 신념을 잃은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lost generation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개입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 믿음 속의 ‘신’이 아닌 ‘인공적인(ex machina)’ 개입일 것이다.

우리는 니체가 말했듯이 Human, all too human이기 때문이다.

레이코 씨 말대로 우리는 모두 비뚤어져있다. 그 비뚤어져있음을 알아차리냐 모르냐 아니면 무시하냐의 차이일 뿐.

아니 그 비뚤어져있다는 것의 기준이 되는 틀 자체가 문제가 있다.

 

사르트르의 명언인 L’existence precede l’essence’처럼 우리의 살아있는 존재가 있어서 우리의 존재의 본질이 있는 것이지 우리의 본질이 미리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은 자고로 이래야 해’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지’하고 실존과 별개인 telos와 essence를 규정한다. 미도리는 소설 중에서 그런 ‘여자는/대학생은/자식은/장례식은/사랑은 이래야 해’를 가장 심하게 거부하고 삶과 죽음의 고정된 방정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정말 ‘피가 흐르는 생명’ 즉 실존의 주체이다. 이 작가가 미도리(초록)이 생명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또한 표지의 붉은색이 생명, 그리고 초록색이 죽음의 숲을 상징하게 한것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는 생각의 틀의 반전이다. 반면 다른 주인공들을 보면 나오코는 물론이고 돌격대, 레이코, 하쓰미, 나가사와 등 모두 주입된 본질에 거스르지 못하고 좌절이든 자조적 태도이든 간에 결국 따라가기만 한다.

단지 미도리가 밝고 사랑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런 실존적 주체성 때문에 미도리는 정말 매력적이고 우리가 삶에서 놓치면 안되는 것을 상징한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p. 48

 

나오코든 기즈키든 죽음은 삶의 일부인 것을 우리에게 환기시키지만 내가 좋아하는 또다른 사르트르의 말이 있다: To be dead is to be a prey for the living.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죽은 후에는 기억에서 사라질 뿐 아니라 산 자들이 마음대로 그의 본질을 해석하게 된다. 와타나베가 잊지 않으려고 의미를 찾으려고 글을 쓰지만 결국 그 글은 나오코 자신의 말이 아닌 와타나베의 글이다.

사르트르는 mortality보다 인간의 finiteness에 중점을 두었다. 우리가 만약 불사신이 된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인간의 한계에 머문다. 우리의 한계는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 meme이 사라지듯 obsolete해지는 것이다. 인간은 갈수록 장수를 누리며 immortality를 향해 나아가지만 실제로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자신이 더이상 obsolete, irrelevant해져서 세상사와 무관한 유물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진정한 상실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69년은 세계 각지에서 revolution의 사회적 폭풍이 불고 있을 뿐 아니라 Beatles의  해체 시기인 점이 흥미롭다. 비틀즈는 해체되고 레논은 요코와 플라스틱 오노 밴드를 이룬다. 그리고 그 전부터 sitar를 이용한 Norwegian Wood나 I am the Walrus같은 기존 고정관념에 반기를 드는 곡들이 연달아 나오고 있었다.

이런 혼란스럽고 상실감이 만연한 시대 속에서 사회의 표면적인 거짓 혁명과 삶의 진실된 변화 속에서 와타나베는 ‘여기가 어딘가’하고 질문하며 미도리의 이름을 부른다. 삶을 위해 그리고 그 삶을 통해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나갈 자신의 실존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