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제목이 너무 길어서 항상 ‘쓰쿠루’로 밖에 기억을 못하는 이 책

(그것도 나는 作る를 읽을 때 주로 츠쿠루로 읽게되서 스크루바를 연상시키는 쓰쿠루로 검색 안할 때가 많다;;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처럼 외래어의 한글 표기는 어렵다.)

 

이곳저곳 작위적인 느낌이 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하루키 (상실의 시대는 예외지만) 소설들에 비해 사실적인 작품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의 과거의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에 더욱더 와닿는 소설이었다. 나 자신도 초등학교 때도 대학교 때도 남녀로 이루어진 5명의 그룹에 속해있었다. (이 책과 달리 우리는 남2, 여3이었지만) 초등학생 그룹에선 없었지만 (아니 있어도 눈치 못챘을지도) 대학생 그룹에서는 이와 같은 이성 간의 긴장감이 존재했고 결국 그것은 우리 그룹의 해체로 이어졌다. 초등학생 때는 그 중 한 명의 이사로 인해 해체되었으니 이때도 공통점이 보인다.

남녀 간의 우정은 물론이고 동성 간의 우정도 은근히 셋, 다섯으로 이루어질 때가 많았다. 단지 둘만으로 이루어진 항상 상대방만을 바라보고 응답해야 하는 관계보다 뭔가 여유나 보완점이 있어서 그럴까 그래서 그런지 옛부터 3과 5는 완벽한 마법의 숫자로 여겨지기도 하다. 하지만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듯 하지만 홀수여서 그런지 아니면 완벽이란 존재 자체가 fragile하기 때문인지 아주 위태로운 조화이기도 하다. 아니 애초에 완벽을 동경하고 이런 이상을 향해 노력하는 우리의 불완전한 삶이 헛수고는 아닐까.

애써 이성적인 요소를 억제하며 순수함을 지키고 (이성이 아닌 동성관계에서도 우리는 모두 세월 속에 변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은가) 항상 같은 곳에서 함께 하려고 했던 (인간은 태고적부터 이동하며 진화했던 homo migrans였는데 우리는 항상 현실 속이든 이상 속이든 어떤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이 인공적인 ‘낙원’의 이미지를 가진 공동체처럼 주인공이 계속 듣던 리스트의 순례의 해도 그렇고 주인공들의 이름 등 작위적인 부분이 많다. 그러고보니 주인공 이름도 ‘만들 작(作)’자가 들어가 있다.

주인공들의 이름은 그들의 성격, 그리고 고대 희랍 철학자들의 5원소와도 연결된 듯하다. 아카 = 빨강 = 불 (은근히 상사의 지시에 따르지 못하고 세상을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는 불같은 면을 보여준다) 아오 = 파랑 = 물 (그룹 안의 소통을 담당하고 사교적이고 유한 성격을 보이는 물같은 면) 시로 = 하양= 공기 (소심하고 유약하고 가냘픈 그녀는 너무 맑은 공기나 새하얀 눈밭처럼 미세한 먼지나 얼룩으로도 더럽혀지고 변색하는 듯하다) 쿠로 = 검정 =흙 (흙을 다루는 도자기도 그렇고 down to earth하며 약간 모성의 느낌으로 시로를 돌보는 것도 그렇고 mother earth같은 느낌의 여성. 솔직히 상실의 시대의 나오코나 이 소설의 시로보다 나는 이런 여자주인공들에게 끌린다.) 그렇다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는? 그렇다. 바로 제 5원소인 에테르, quintessence라고 불리는 것처럼 필수적인 요소다. 색채가 없고 모양이 없지만 모든 것을 감싸고 필수적인 영혼처럼 작용하는 에테르..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作, 그렇기 때문에 무색에서 어떤 색이든 입힐 수 있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쓰쿠루는 어찌보면 투명한 프리즘처럼 모든 빛을 발색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다. 하지만 이런 부담을 덜어주려고 비롯할 창(創)자가 아닌 만들 작(作)자를 쓴 아버지의 배려가 나는 살짝 감동이었다.

뭐랄까.. 대부분의 부모가 자신의 자식이 자신을 능가하길 바라거나 적어도 중요한 인물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작명을 하고 돌상에서 자신의 바람이 투영된 것을 집고 학교와 직장과 결혼 상대 등에 넌지시 영향을 주려고 하는데 이 아버지는 쓰쿠루에게서 이상이나 창조를 바라지 않고 아들이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현실을 차곡차곡 손보는 듯한 삶을 살게 해준 기분이다.

나 자신도 엄마아빠가 읽는 책에서부터 교육 및 삶의 거의 모든 부분에 되도록 자신들의 영향을 억지로 주입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하게 내버려둔 한국사회에서 아주 특이한 부모였고 그 덕분에 나의 길을 스스로 찾을 수 있었기에 감사한다.

타의에 의해서든 자의에 의해서든 완벽한 이상은 삶과 죽음의 경계처럼 쉽게 무너지고 이는 5명의 관계 뿐 아니라 각자의 삶에서도 잘 보인다.

그리고 위에서 5원소에 각자의 성질인 것처럼 구분하였지만 과연 우리는 그런 틀 안에 구분될 수 있는 것일까? 남자가 여자의, 여자가 남자의, 아카가 아오의, 아오가 아카의 그리고 시로가 쿠로의, 쿠로가 시로의 면과 겹쳐지는 부분들이 상당히 있을텐데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나 물질을 생각할 때 그런 ‘개성’이나 ‘성질’의 틀 안에만 그들을 규정하려고 한다.

이런 경계를 보여주는 인물이 하이다 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시로(하양)와 쿠로(검정)의 경계인 회색을 연상하고 여성과 남성의 경계, 물리학과 형이상학의 경계, 꿈과 현실의 경계 그리고 생과 사의 경계에 있다. (소설 끝에서도 우리는 그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쓰쿠루의 기억이 꿈인지 현실인지 모호한 상태다)

플라톤의 Theaetetus를 읽으면서 우리가 사물에서 감지하는 어떤 성질 (백색이든 신맛이든)은 그것이 느껴지는 사물(대리석이든 와인이든) 안에서도 그것을 느끼는 사람의 기관(눈이나 혀) 안에서도 항시 같은 상태가 아니라 계속 변하고 무한하다고 하는 것을 읽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하고 어느 한 순간도 이전과 같은 곳(같은 상태)에 머물지 않는다. 다자키 쓰쿠루의 순례는 변한 그의 친구들과 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계 한다. 즉 perceiver와 perceived의 변화를 깨닫게 한다.

우리는 그런 무한한 변화와 가능성을 인지하고 인간과 삶을 규정짓는 틀 (예: 5개의 손가락)에서 벗어나야 하이다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서 나온 인물처럼 초인적인 능력이나 새로운 직관을 얻게 되지 않을까.

마지막에 일본인들의 지하철 속 모습과 옴진리교의 지하철 가스테러에 대한 언급은 그만큼 우리의 한 곳을 향한 고정된 시선이 한정짓고 억압하는 우리의 삶, 그리고 그렇게 한 가지의 전체주의적 이상을 향한 무서운 집착이 불러 일으키는 끔찍한 희생을 연상시키면서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상실의 안타까움에 역점을 둔다.

그리고 그런 상실 속에서도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려는 다자키 쓰쿠루에게서 치유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듯하다.

과거든 미래든 개념치 않고 현재 나의 모습에서 열심히 나 자신과 나의 삶을 만들어가보자.

carpe diem.

 

 

질투란, 쓰쿠루가 꿈속에서 이해한 바로는,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감옥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인이 스스로를 가둔 감옥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힘으로 제압하여 집어 넣은 것이 아니다. 스스로 거기에 들어가 안에서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철창 바깥으로 던져 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가 그곳에 유폐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물론 나가려고 자기가 결심만 한다면 거기서 나올 수 있다. 감옥은 그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에. 그러나 그런 결심이 서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돌벽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것이야말로 질투의 본질인 것이다. p. 61-62

“…쓰쿠루 선배와 달리 내게는 이런 걸 하고 싶다는 뚜렷한 뭔가가 없어요. 뭐가 어찌 됐든 가능한 한 깊이 생각하고 싶어요. 그냥 순수하게, 자유롭게 사고해 나가고 싶다. 그것뿐이에요. 그러나 순수하게 사고한다는 건 생각해 보면 진공을 만드는 것 같은 건지도 모르죠”

“진공을 만드는 인간도 세상에 조금은 필요할 거야” – p. 68-69

“자유롭게 생각한다는 건 다시 말해 자기 육체를 벗어난다는 말과도 같아요. 자기 육체라는 한정된 우리를 멋어나, 사슬을 벗어던지고, 순수하게 논리를 비약시키는 거예요. 논리에 자연스러운 생명을 주는 거죠. 그것이 사고에서 자유의 핵심입니다.” – p.83

“무슨 일이건 반드시 틀이란 게 있어요. 사고 역시 마찬가지죠. 틀이란 걸 일일이 두려워해서도 안 되지만, 틀을 깨부수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안 돼요. 사람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그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틀에 대한 경의와 증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늘 이중적이죠.” – p. 85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떠나서,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머릿속에서 내쫓아 버리지는 않습니다. 꼭 논리를 신봉하는 건 아니니까요. 논리에 맞지 않는 것과 논리성의 접점을 찾는 것도 중요한 작업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 p. 102

“… 때로 그런 구체적인 예는 그것이 나타나는 시점에 이르면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라는 하나의 지점으로 귀결되고 말아. 거기에는 중간이 없어. 이른바 정신의 도약. 거기서 논리는 거의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해.”

“분명 그 시점에서는 아무런 힘도 발휘 못 할지도 모릅니다. 논리란 편하게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매뉴얼 북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나중에는 아마도 거기에 논리성을 적용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나중에는 너무 늦을지도 몰라”

“늦고 안 늦고는 논리성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 p. 103

“…참 묘한 세상이야. 한편에서는 부지런히 철도역을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거액을 받고 그럴듯해 보이는 말을 만들어 내는 사람도 있으니.”

“그걸 일반적으로 ‘산업의 세련화’라고 하지. 시대의 흐름이야” – p. 211

 

“… 어이, 이런 거 엄청난 패러독스라는 생각 안 들어?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발견하게 돼. 그리고 발견할수록 자기 자신을 상실해 가는 거야.” – p 244

그러나 여기서는 그냥 혼자인 것만이 아니다. 이중적인 의미에서 혼자이다. 그는 이방인이고 주위 사람들은 모두 쓰쿠루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그가 일본에서 늘 느끼던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고립감이었다. 이거 그렇게 나쁘지 않은데, 하고 쓰쿠루는 생각했다. 이중적인 의미에서 혼자라는 것은, 어쩌면 고립의 이중 부정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이방인인 그가 여기서 고립된다는 것은 완전히 합리적인 일이다.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자신은 정말 올바른 장소에 있는 것이다. p. 307

그때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다자키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  p. 363-364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 p. 436-4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