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8. 어네스트 밀러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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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취미로 하지 않아도 학창시절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모르는 이 없을 작품 중 하나가 바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일 것이다. 처음 이 작품을 접했던 학창시절의 충격이 너무 커 이십대에도, 삼십대로 넘어 와서도 꾸준히 재독을 하고 있는 작품이다. 며칠 전 잠이 오지 않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버전으로 재독하니 현재의 마음가짐 그대로 수년 전과는 다른 감상문을 남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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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군 기자로 활동하던 헤밍웨이는 종전 후에도 특파원으로 활동했으나 역시 그의 삶은 작가의 삶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나는 그를 작가의 삶으로 완벽히 귀결시킨 작품이 바로 <노인과 바다>라고 생각한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로 1953년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받은 노벨문학상 역시 <노인과 바다>를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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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산티아고 노인만큼 운이 없는 노인이 또 있을까. 그는 아마 세상까지는 몰라도 그가 살아온 마을에서 만큼은 가장 운이 없는 노인일지도 모른다 – 고 산티아고 노인은 생각했다 – 어부인 그는 여든 하고도 나흘째 되는 날까지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다. 이제는 너무도 노쇠한 그가 어부로서 고기를 잡지 못하는 것이야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인정하는 일이었지만 문제는 현실이다. 고기를 잡지 못하면 먹을 것도 입을 것도 그러니까 삶을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그 어느 것도 쉽게 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실은 이제는 먹는 것조차 귀찮아 끼니를 거르는 일이 어제, 오늘일은 아니다. 커피 한 잔으로 공복 허기를 달래고 배를 타고 나선 노인은 밤하늘에 달이 뜰 때까지 노를 저어 보지만 여전히 고기는 잡히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노인은 팔십오가 행운의 숫자라 떠들며 오늘이 되길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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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여든 나흘째가 지나고 노인은 기쁜 마음으로 내일을 준비하며 잠이 든다. 보통의 날들보다 더 일찍 새벽을 맞는 노인은 여든 닷새가 된 오늘의 희망을 가슴에 안고 다시금 배에 오른다.

하루 반나절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던 낚시줄이 움직이자 노인은 다급했다. 이 녀석은 지금까지 노인이 만나온 그 어떤 녀석보다 크고 아름다운 녀석이 분명했다. 노인은 생각했다. 지금까지 최고로 크고 아름다웠던, 400키로그램이 넘는 그 녀석을 말이다. 지금 것은 족히 그 녀석의 두배는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노인에겐 희망만큼이나 절망도 가득했다. 노쇠한 지금의 몸으로 과연 이 길고도 지루한 투쟁을 이겨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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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는 노인이 맞은 여든 닷새째의 하루를 하드보일드 스타일로 짧고도 강렬하게 그려내고 있다. 간결하면서도 현실적인 표현 속에는 헤밍웨이의 깊은 메시지가 잘 담겨있고 순간에 대한 서사는 물론, 강건한 문체 속에서도 허무주의를 극복한 인간상과 실존적 투쟁에 대해 잘 그려내고 있다.

특히 내가 관심 갖는 헤밍웨이의 실존주의는 그만큼이나 좋아하는 카뮈의 실존주의와는 그 의미도, 색채도 다르다. 헤밍웨이는 투쟁을 통한 문명인의 의지와 함께 자연과 싸우며 깨닫는 실존적 성찰을 서사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매우 서서히 점진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단순한 플롯에 장치한 이 실존주의는 특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초기계문명과 메카니즘적 조직화로 인하여 개개인의 개성을 잃은 체 집단화 되고 소외되어가는 현 상황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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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노인과 바다>를 끝으로 엽총으로 자살한 헤밍웨이가 소설의 출간 직후 당시 출판사 사장이었던 찰스 스크리브너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소설은 내가 평생 동안 작업해 온 산문 작품입니다. 쉽고도 단순하게 읽힐 수 있고 길이가 짧은 것 같지만 가시적 세계와 인간 영혼 세계의 모든 차원을 담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로서 제가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작품입니다.” 워낙 좋아하는 작품 이다보니 주절주절 글이 길어졌지만 사실 그가 편지에 쓴 짧은 몇 줄의 문장이 <노인과 바다>에 대한 가장 정확한 표현이며 평가였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한 번 읽기엔 너무도 아쉬운 작품이라 꼭 세 번쯤은 읽어주기를 바라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