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는 항상 옳다고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니체.. 이름만 들어도 어렵다. 옳다면 무엇이 옳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집에 있는 니체의 책을 폈다. 난 그 페이지의 글을 읽고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나는 내가 더 즐길 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보다 나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 존재한 이래로 인간은 너무 즐길 줄 몰랐다. 나의 형제들이여, 이것만이 우리의 원죄다! 우리가 더 즐길 수 있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거나 고통을 줄 생각을 더 잘 버릴 수 있다.


 역시 니체, 니체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스스로가 즐길 수만 있다면 더 나은 세상을 바라보게 될 일이다. 다른 사람의 일에는 크게 신경이나 관심이 가질 필요가 없다. 스스로가 인생의 주인이라며, 인생의 중심에 자신이 있다면 그 인생은 충분히 재미있다. 그렇지 않기에 사람들은 타인의 말과 행동에 신경을 쓰고 자신의 인생까지도 망치고 있다.   그 페이지를 읽은 건 지난 8월 한참 더운 여름날이었다. 친구와 영화를 보기 위해 광화문에 나가면서 들고나가 읽기 시작하였다. 읽다 안 읽다 서론부터 읽다 본론으로 갔다가 처음부터 다시 읽기를 반복하면서 집중해서 읽은 건 한 다시 읽기를  한 여름 더위부터 첫눈이 올 때까지 함께 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난 그 시간 동안 나에 대해서 그리고 나의 삶에 대해서 많이 고민했다.


절대로 굴하지 않는 삶의 살아 있는 등대로서 그것들은 옹이 지고 굽은 채로 유연하면서도 굳건하게 바닷가에 서 있어야 한다. 폭풍이 바다로 휘몰아치고, 산의 돌출부가 물을 마시는 곳, 그곳에서 나무들은 언젠가 저마다의 시련을 견디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밤낮을 뜬눈으로 지내야 한다.


인간에게 대지와 삶은 무겁다. 그것은 중력의 영이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가벼워져서 새가 되기를 바라는 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나는 이렇게 가르친다. 물론 아픈 자와 병든 자처럼 사랑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자들의 경우에는 자기애도 악취를 풍기기 때문이다!

인간은 온전하게 건강한 자로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나는 가르친다. 자기 자신을 참아내느라 헤매고 다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참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오늘과 내일을 위한 계율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모든 기술 중에서 가장 정교하고 교묘하며, 가장 인내심이 요구되는 궁극적인 기술이다. 말하자면 모든 소유물은 그 소유자에게 잘 숨겨져 있어서, 매장된 모든 보물 중에서 자기 자신의 것이 가장 나중에 발굴되는 것이다. 중력의 영은 바로 그런 일은 한다.


모든 “그러했다.”를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로 바꾸는 것, 바로 이것을 나는 구원이라고 부른다. “그러했다.” 이를 부드득 가는 의지와 더없이 고독한 슬픔이라고 불린다. 의지는 이미 행해진 일에 무력하고, 지나간 모든 일에 악의적인 방관자다. 의지는 돌아가기를 의욕 할 수 없다. 시간을 부수지 못하고, 시간의 욕망을 이기지 못한다. 이것이 의지의 더없이 고독한 슬픔이다.    의지는 시간이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에 분노를 금치 못한다. “과거에 있었던 것.” – 이것이 의지가 굴릴 수 없는 돌의 이름이다. 의지는 자신이 돌아가기를 의욕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괴로워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복수한다 시간에 대한 반감, “그러했다.”에 대한 의지의 반감, 바로 이것만이 복수 그 자체다. 참으로 우리의 의지 안에는 아주 어리석은 것이 살고 있다. 이 어리석음이 정신을 배우게 된 사실이 모든 인간적인 것에 저주가 되었다.    모든 ‘그러했다’는 하나의 파편이자 수수께끼이며 섬뜩한 우연이다. 창조적 의지가 “그런데 나는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라고 그에 대해 말할 때까지는. 창조적 의지가 “그런데 나는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나는 그렇게 되기를 원할 것이다!”라고 그에 대해 말할 때까지는.


난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과연 넌 그렇게 되기를 원한 삶을 살았냐고?  그러했다고, 나는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고, 난 대답했다. 아직도 넘어야 할 많은 산 중에 몇 개만을 넘었을 뿐이지만 스스로의 선택으로 삶을 살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난 대답했다.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우리는 각자의 어려움, 시련에 닿아 있는 삶을 살고 있으면 그 삶을 견디고 있다고. 그러니 도망가지 말라고. 지금처럼 당당하게 스스로를 넘어서라고 말이다. 그리도 만약 지금은, 지금은 이겨내지 못한다고 해도 피하지 않고 도망가지 않는다면 반드시 스스로 넘어서게 된다고 말이다.
니체는 후회 없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답게 사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계속 말한다. 인간이기에 여러 가지 유혹들에 흔들릴 수 있지만 그래도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라고 말한다. 질문의 답은 자신 안에 있다고.  어느 순간에도 자신을 놓지 말고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라고. 삶에 대한 끊임없이 노력으로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라고. 


나는 ‘나’와 ‘아니다’, ‘그렇다’를 말하는 것을 배운, 반항적이고 까다로운 혀와 위를 가진 사람을 존경한다. 나는 이렇게 가르친다. 언젠가 나는 것을 배우려는 자는 우선 서서 걷고 달리며 기어오르고 춤추는 것을 배워야 한다. 단번에 나는 법을 배울 수 없다.
나는 길 자체를 물어보고 시도해 보았다. 나의 모든 행로는 물어보고 시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 이제 나의 길이다. 그대들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나에게 ‘길을’ 묻는 자들이게 그렇게 말했다. 말하자면 그런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누가 이쪽으로 가니깐 나도 이쪽으로 간다. 누가 저쪽으로 가니깐 나도 저쪽으로 간다. 그런 삶이 아닌 내가 이쪽으로 방향을 정했으니 나는 간다, 가 중요하다고.  그 한 발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도중에 쓰러진다고.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를 갖고 나아가는 내가 되는 길. 그 길의 끝에 차라투스트라가 웃으면서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