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촌 황희 평전

조선의 기틀을 다진 탁월한 행정가이자 외교가

이성무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14년 12월 12일 | ISBN 978-89-374-3148-7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46x222 · 540쪽 | 가격 25,000원

책소개

유연함과 강건함을 적절히 발휘해 정국을 조율하며
국가 전 분야의 기강을 세워 세종과 함께 태평성대를 연
조선 최고의 재상 황희의 진면목을 밝힌다

조선 왕조 최장수 영의정으로서 정치, 경제, 국방, 외교, 법률, 종교, 예술 등 전 방위로 활약하며 조선의 벼리를 세운 명재상 황희의 생애를 담은 『방촌 황희 평전』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황희는 승정원 관리인 지신사로서 태종을 보좌하여 태종에게서 “이 말이 누설된다면, 내가 아니면 네 입에서 나온 것이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총애를 받았으며, 세종 때는 오랜 경륜을 바탕으로 모든 방면의 정사를 빈틈없이 처리해 왕이 그를 심복처럼 의지했다. 그리하여 그는 왕과 신하들 사이에서 의견을 조율하며 개혁의 완급을 조절했고, 4군 6진 개척을 실제적으로 진두지휘하여 ‘해동요순’이라 일컬어질 만큼 찬란한 시대를 성군 세종과 함께 꽃피웠다.
이 책은 그동안 단편적 일화로만 알려져 있던 황희의 실제 삶과 공적을 역사적 맥락에서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분석한다. 56년 관직 생활 동안 24년간 재상직을 맡았고 그 가운데 18년 동안 줄곧 영의정 자리를 지키면서 새 왕조의 기틀을 다져 나간 황희. 그가 다방면에 걸쳐 이루어 낸 크고 작은 업적과 더불어 뇌물 의혹, 사위와 아들 행실 문제 등 그가 남긴 오점까지 황희의 전 면모를 두루 살펴본다. 그간 잘못 전해진 모습의 우유부단하고 인자한 청백리 황희가 아닌, 능력 있고 경험 많은 ‘행정의 달인이자 외교의 사전’ 황희의 진짜 모습을 만난다.

편집자 리뷰
  • 새 나라 조선의 벼리를 세운 최고의 재상

황희는 1363년(공민왕 12년)에 태어나 1452년(문종 2년)에 죽었다. 고려-조선 교체기, 원-명 교체기의 격동의 시대를 살다 간 것이다.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즉위한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 학관에 보임된 황희는 새 왕조가 들어선 후에도 태조에게 유능함을 인정받아 세자 우정자에 임명되어 벼슬살이를 이어 갔다.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은둔한 사람들과 함께하려 했으나 그들이 만류하며 천거해 벼슬길에 다시 나아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윽고 황희는 창업 군주 태종에게도 발탁되어 1405년(태종 5년) 지신사(도승지)가 되면서 임금의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총애를 받게 된다. 하루 이틀이라도 보지 못하면 태종이 황희를 불러들여 만났으며 “이 일은 나와 경만이 알고 있으니, 만약 누설된다면 경이 아니면 곧 내가 한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특히 왕권을 위협하던 외척인 민무구ㆍ민무질 형제를 제거하는 데 황희가 큰 역할을 했는데 훗날 이 일로 태종의 오해를 사 양녕 대군 폐위와 관련되어 파면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 또한 태종의 정치적 행위로 보았다. 몇 년 후 태종은 세종에게 권해 황희를 다시금 기용하게 하였고 세종은 안심하고 황희를 24년간이나 재상으로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세종의 부름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와 직첩을 돌려받았을 때 황희는 이미 나이가 예순이었다. 이후 87세에 벼슬에서 물러나 90세로 영면하기까지 30년 가까이 세종을 도와 조선의 중추를 세우는 역할을 했다. 황희는 의례상정소 도제조로서 조선 왕조의 예약 제도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고, 영의정에 올라서는 조선의 정무를 총괄하며 특히 4군 6진 개척을 배후에서 지휘해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한 번 보면 잊지 않는 특출한 기억력으로 옛일을 두루 알아 예조 판서 시절에는 고려와 중국의 국가 제사 제도를 상고해 조선 고유의 제도로 정착시켰으며, 외교에서도 이러한 능력을 발휘해 명과의 미묘한 문제들을 원만히 처리해 냈다. ‘해동요순’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세종 시대를 든든히 뒷받침한 재상이 바로 황희였다.

 

  • 청백리 재상이 아닌 행정의 달인 황희

황희는 회의석상에서 절대로 먼저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의정이 먼저 말하면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거나 그 말이 옳다고 아부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황희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두루 듣고 마지막에 종합해 의견을 개진했다. 그러므로 태종이나 세종은 으레 “황희 정승의 말대로 하라!” 했다고 한다. 또한 형벌은 되도록 가볍게 해 처벌에 실수할지언정 억울한 사람은 생기지 않도록 했으며 새 왕조가 들어서 어수선한 시기에도 옛 법을 가볍게 변경하려 하지 않았다. 새 왕조의 기틀을 잡아 나가던 시기, 왕과 신하들 사이에서 의견을 조율하며 개혁의 완급을 조절하는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연함과 과단성을 발휘해 4군 6진 개척의 성과를 이루어 냈다.
그러나 재상으로 24년, 영의정으로 18년을 재직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만큼 여러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기도 했다. 홍유룡의 첩을 노비로 삼기도 했고, 남원 부사에게서 안롱을 뇌물로 받기도 했으며, 자신과 친한 안숭의 아들 안숭신을 특채했다. 또 제주 감목관으로서 말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벌을 받게 된 태석균을 잘 봐주라고 압력을 넣었다가 파면되기도 했다. 대사헌 시절 황금을 뇌물로 받아 ‘황금 대사헌’이란 별명을 얻는가 하면, 사위 서달이 아전을 죽인 일이 발생하자 황희가 맹사성 등 여러 사람에게 청탁해 서달을 면죄받게 하려고 한 일이 들통 나기도 했다. 이 일로 황희뿐 아니라 맹사성, 신개 등 일에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파면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종은 다시 황희를 좌의정에, 맹사성을 우의정에 임명해 일을 맡겼다. 그 밖에 둘째 아들 황보신과 사생아 황중생이 국가 물품을 훔쳐다 쓴 사건도 있었다.
이러한 황희의 실상은 그간 널리 알려져 있던 ‘청백리’ 황희와는 너무나 먼 모습이다. 당대나 후대의 평에서도 황희는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해 집안을 잘 다스리지 못했고 청렴결백하지 못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태종과 세종은 황희를 내치지 않고 계속해서 의지했다. 그에 대해 저자는 “왕권 국가에서 국왕의 입장은 다르다. 황희의 식견과 경륜이 높고, 일마다 누구보다도 옳은 판결을 하기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는 국왕으로서는 세세한 잘못 따위는 치지도외(置之度外)할 수 있었다. 왕이 기대고 의뢰하는 것이 이 정도에 이른 것이다.”(453쪽)라고 평했다. 실제로 세종도 황희를 두고 “지혜는 일만 가지 정무를 통괄하기에 넉넉하고, 덕은 모든 관료를 진정시키기에 넉넉하도다.”(454~455쪽)라고 칭찬하며 그의 국무 총괄 능력을 높이 샀다.
그리하여 이 책은 다양한 일화를 통해 청렴하고 온화한 모습으로 인식되어 온 황희의 실제 삶과 공적을 역사적 맥락에서 객관적으로 조망하고자 한다. “너도 옳고, 너도 옳다.” 하던 인자한 정승이 아니라, “전하의 총명으로서 옳고 그른 것을 분명히 짐작하실 것입니다. …… 그른 것도 옳다 하고 옳은 것도 그르다고 한다면 어찌 폐단이 없겠습니까?”(85쪽)라며 왕의 올바른 판단을 촉구하던 빳빳한 신하이자 매사에 넓은 안목으로 정확한 판단을 내린 유능한 관료 황희의 진면목을 밝힌다.

목차

머리말

1 격동의 시대, 황희의 탄생
공민왕의 개혁 실패, 고려의 몰락
조선의 건국
황희의 선계
총명하고 민첩한 아이

2 태종에게 발탁되어 요직에 중용되다
창업 군주 태종의 시대
기나긴 벼슬길의 시작
의롭지 않으면 왕명일지라도 듣지 않다
예조 판서가 되어 조선 고유의 제도를 닦다
세자의 일로 내쳐져 귀양 가다

3 세종을 보좌해 태평성대를 열다
위대한 군주 세종의 혁신
세종의 부름으로 관직에 복귀하다
좌의정에 올랐으나 구설에 휘말리다
영의정에 올라 정무를 통괄하다

4 조선의 위상을 다진 노련한 외교술
4군 6진 개척을 배후에서 지휘하다
파저강 여진 정벌
엄단과 회유의 양면 정책
북방 경계 확장과 대명 전략
문치주의 사대 외교
일본과의 관계

5 명재상 황희, 세상을 떠나다
마지막까지 세종을 보필하다
황희, 긴 생애를 마치다
황희에 대한 논평과 추모
황희의 자녀들
후손 중의 명인들

6 황희를 논하다

연보
장수 황씨 입격자 명단
참고 문헌
찾아보기

작가 소개

이성무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사학과를 거쳐 국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민대학교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로 있으면서 미국 하버드대학 옌칭연구소 연구교수와 독일 튀빙겐대학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정신문화연구원 부원장, 연세대학교 용재석좌교수를 지냈고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현재 대학민국학술원 회원, 남명학연구원장,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한국의 과거 제도』, 『조선 초기 양반 연구』, 『조선의 사회와 사상』, 『조선 양반 사회 연구』, 『한국 역사의 이해』(전 7권), 『조선 왕조사』, 『조선 시대 당쟁사』, 『조선을 만든 사람들』, 『명장 열전』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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