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정현종이 연세대학교 국어국문과 교수직에 있다가 정년 퇴임을 맞게 된 것을 기념해 ‘정현종 선생님으로부터 시를 배운, 그것도 선생님의 시심에 들려서 시 공부를 일생의 목표로 삼고야 만 사람들’이 감사의 뜻으로, 그리고 그간 시인에게서 받은 가르침을 정리하고 되돌려 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함께 글을 써서 펴낸 책이다. 정현종은 한 인터뷰에서 “시간은 흘러가고, 그 속에서 나도 자연히 변한다. 교수라는 직업의 정년일 뿐 특별한 의미가 없다. 시인에게 정년이 있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 책의 제목 ‘영원한 시작’은 그의 인생에 정년 혹은 하나의 마감이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의미하는 ‘영원한 시작(始作)’으로도, 그리고 교수로서의 직을 떠나며 시인으로서만 살게 된 이가 앞으로 더더욱 열을 다할 ‘영원한 시작(詩作)’으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정현종 선생님의 정년 퇴임을 기념하여 제자들이 함께 쓴 글들을 엮은 책이다. 일반 독자들에게는 ‘정현종 시인’이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겠지만 정현종 시인이 거의 30년 동안 교수의 직함으로 사람들과 더불어 지낸 곳들이 또한 있었다. 그중 팔 할에 해당하는 기간을 차지하는 복을 누린 장소가 있으니 그곳은 연세대학교이다. 이 책의 구성과 집필에 참여한 필자들은 모두 연세대학교에서 정현종 선생님으로부터 시를 배운, 그것도 선생님의 시심에 들려서 시 공부를 일생의 목표로 삼고야 만 사람들이다. “숨어도 가난한 옷자락 보이는” 게 시인이라고 정현종 시인은 언젠가 말한 바 있지만 시 공부하는 사람의 장래도 유유상종하는 운명을 피하기가 어려울 터이니, 그런 삶을 살기로 작정하는 마음에 불을 지른 시인의 그 무엇이 자못 신비하고 궁금할 수밖에 없다.품세계를 깊이 있게 조명하고 새로운 면모를 밝혀내는 연구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정과리│「책을 내는 말」 중에서
정현종의 시는 전통 서정시를 넘어선 혁신인 동시에 한국 근대 시의 근간을 닦는 것이었다. 한국 전쟁 이후 허무주의에 탐닉하고 절망적인 분위기에 압도되어 있던 한국의 시단에서 정현종은 과감하게 한국 서정시의 지배적인 흐름으로부터 선을 그었고, 자아와 외부 세계 간의 역동적인 관계를 추구함으로써 고통을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했다. 그 후 40여 년의 시력(詩歷)을 닦아오는 동안 그의 시는 변모를 거듭해 왔고 이제 시인에게 세계는 수없이 많은 요소(질료)들의 거대한 협주곡(운동을 통한 교감)이며, 시는 이 세계의 풍성함과 찬란함을 비추는 거울이다. 정현종 교수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이 ‘언어로 표현되어 나오기 직전의 어떤 충만하면서도 동시에 열려 있는 시의 현존적 상태로서 시를 이해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현존적 상태에서 분주히 또는 느긋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두고 ‘상상력’이라는 막연한 용어로 지칭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실상 그 지칭에 기대어 그 지칭을 넘어서 그 상상을 촉발한 사물들이 내뿜는 기운과 상상의 주권을 가진 존재의 의지적 활동, 그리고 그 상상에 응답하는 자의 육체적 반응과 그 화창(和唱)하는 존재들을 감싸고 있는 배경이 ‘얼싸절싸’ 하면서 함께 거들어, 지금까지의 언어로는 명명할 수 없고, 미래의 필설로도 다 할 수 없는, 세상이 통째로 현재의 충만으로써 미래의 울타리 바깥으로 넘어가는 그런 정황을 연출해 내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 정현종과 상상의 힘
필자들은 정현종 시학의 요체가 ‘상상력’이라고 보았고, 상상은 질료와 운동과 교감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이 책의 구성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나왔다. 제1부 「질료」에서는 사물, 공기, 물, 술, 나무, 거울이라는 주제로 정현종의 시세계를 분석했고, 제2부 「운동」에서는 용약(踊躍), 시간, 소리, 웃음, 역설, 성애를 중심으로 시를 읽었으며, 제3부 「교감」에서는 유람과 향연이라는 이름 하에 스승과 제자들이 나누었던 이야기(정담)들을 실었다. 이러한 분석에는 그들이 시를 공부하며 함께 읽었던 가스통 바슐라르, 옥타비오 파스, 그리고 니체의 철학이 무르녹아 있다.
● 정현종(1939~)
정현종의 시작(詩作) 활동은 그가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던 1965년 《현대문학》에 「화음」, 「독무」 등이 추천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대학 재학 시절부터 《연세춘추》에 시를 발표해 박두진 교수로부터 주목을 받은 바 있던 그는, 등단 후 1966년 황동규, 박이도, 김화영, 김주연, 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사계》를 결성하고, 1974년에는 미국 아이오와 대학 국제 창작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등 활발한 문학 활동을 보였다. 1965년 첫 시집 『사물의 꿈』 이후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견딜 수 없네』, 『정현종 시전집 1·2』 등의 시집과, 시선집 『고통의 축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이슬』 등을 냈으며, 시론과 산문을 모은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숨과 꿈』, 『생명의 황홀』 등을 펴냈다. 또한 외국 작품을 국내에 소개하는 데에도 열성을 보여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강의 백일몽』, 『100편의 사랑 소네트』 등을 우리말로 옮겨 네루다와 로르카를 국내 독자들에게 알리기도 했다. 한국문학작가상, 연암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했으며, 2004년에는 칠레 정부에서 전 세계 100인에게 주는 ‘네루다 메달’을 받았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를 지냈고, 1982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취임해 2005년 정년 퇴직을 맞았다.
● 엮은이 정과리
1958년 대전 출생.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조세희론」이 입선돼 평론 활동을 시작했으며, 1988년~ 2004년 계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으로 활동했다. 지은 책으로 『문학, 존재의 변증법』, 『존재의 변증법 2』, 『스밈과 짜임』, 『문명의 배꼽』, 『무덤 속의 마젤란』 등이 있다. 현재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책을 내는 말 / 정과리 Ⅰ. 질료 (사물) 없는 ‘것’이 없는 세계 – 정현종의 초기 시에 나타나는 사물 / 정현아 (공기) 정현종의 시 혹은 춤 – 자유에 기반한 ‘얽힘’의 현현 / 이승은 (물) 비와 술과 이슬 – 물의 이미지 / 장철환 (술) 술잔을 낚는 시인 – 정현종의 시와 술 / 스티븐 캐프너 (나무) 초록 뇌수, 초록 심장 – 정현종의 나무 / 김창환 (거울) ‘거울’과 ‘참’에 비친 풍경들 / 이윤진 Ⅱ. 운동 (용약) 까닭 모를 은유는 “떨어지면 튀는 공”이다 – 정현종 시의 원초적 장면 찾아가기 / 정과리 (시간) 깨진 거울과 고장난 시계, 그리고 한 꽃송이 – 정현종과 순간의 성화 / 조강석 (소리) 형안의 귀 – 정현종과 니체 / 강계숙 (웃음) 세상의 옆구리를 간질이는 손 / 이재원 (역설) 시의 모더니티와 역설의 존재론 – 정현종의 동인지 시대 / 최현식 (성애) 튀는 공과 우주의 에로스적 교감 – 정현종의 시와 시론 / 김응교 Ⅲ. 교감 (정담1) 병허 선생과 빈병당 주유기 – 정현종 선생님과의 만남 (정담2) 시 · 세계 · 마음 – 외솔관에서의 향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