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금 간 것들이 또 새로운 세상을 여나니”
가장 작은 존재부터 아득한 별들에 이르기까지 사라지는 것들 안에서 발견한 생명의 내적 진리
소월시문학상, 만해상, 정지용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시인 오세영 신작 시집
박목월 시인에 의해 시 「잠깨는 추상」이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등단한 오세영 시인의 열네 번째 시집 『마른하늘에서 치는 박수 소리』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첫 번째 시집 『반란하는 빛』(1970) 이래 시인의 시력(詩歷)은 올해로 42년이 되었다. 『마른하늘에서 치는 박수 소리』는 ‘1부 미시령 지나며’, ‘2부 우리들의 학교’, ‘3부 새’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60편의 시를 담았다. 맑고 서정적인 시인의 시선 안에서 사물과 자연, 인간 등 존재하는 것들의 의미를 언어 실험을 통해 쉼 없이 성찰해 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비루한 현상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존재부터 저 멀리 아득한 곳에 있는 별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내적 진리를 밝히며 그 안에서 각기 아름다운 나의 세상을 발견해 낸다. 시인은 들길을 걷고 사막을 건너고 고개를 오르며 들꽃과 별빛과 노을의 운명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지켜보며 나고 지는 생명의 운명,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지닌 숙명, “불꽃”이자 “이슬”이고 “바람에 날리는 흙먼지”처럼 우리 곁에서 끊임없이 생동하는 불변의 진리로서의 생명을 전한다. 시인 눈길이 닿으면 “모든 추락하는 것들”은 “거듭”난다. 시인이 발견한 존재의 신비와 아름다움이 아귀다툼에 지친 자들에게 하루만큼도 닳지 않은 새로운 삶에 대한 의지를 선사할 것이다.
■ 적요한 가운데 생명을 지닌 만물이 치열하게 펼치는 한생의 아름다운 일기
오세영 시인의 시 세계 안에는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수많은 우주가 담겨 있다. 그에게 세상 만물은 태어나 자라고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삶과 다르지 않다. ‘죽음(소멸)’을 필연적 숙명으로 가지고 있는 모든 개별자들은 시인에게 생명(生命)을 지닌 존재와 다름없다. 그래서 시인은 “먼 하늘 은핫물을 펜 끝에 촉촉이 찍어”( 「오동 잎 」 ) 적요한 가운데 치열하게 펼쳐지는 만물의 내적 원리, 즉 생명의 존재 형식을 탐구하며 “편견 없는 마음”(「수확 1」)으로 “한생의 일기”를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써 내려간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의지하고, 배신하고, 감사하고, 분노하고, 저주하고, 용서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무고하고, 모략하고, 욕하고, 칭찬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며…… 분주히 돌아가는 한세상 인간사도 하늘에서 보면 한 무리 개미 떼! —「개미」에서
시인에게는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의 삶이 인간의 삶과 멀지 않다. 또 “여름내/ 종횡무진 텃밭을 점령했던 호박 넝쿨”이 시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앙상한 뼈만 남아 있는 “양로원의/ 치매 노인”이 살아온 삶을 떠올린다.( 「호박 넝쿨」 ) 그에게 자연의 순환과 생명의 변화무쌍함은 인간의 삶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자동차나 엔진, 타이어 같은 물질들 역시, 자연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다른 것에 종속되거나 환원되지 않으면서 오롯이 그 자신의 생명적 형식을 얻기는 마찬가지다. 이처럼 시인의 시선이 현상들의 세계 바깥에서, 현상들의 표면을 뚫고 들어가 개별자들의 가장 깊숙한 곳에 내재해 있는 ‘태어나고 성장하고 소멸하는’ 원리를 꿰뚫어 본다. 즉 그는 존재의 빛과 어둠을 고스란히 껴안고, 가장 작고 하찮은 생명에서조차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하나의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존재의 우주를 들여다보는 신의 시선이 머물러 있다.
시로써 말할 뿐이다. 그 외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이제 말빚을 지는 일도 지겹구나. —시인의 말
■ 생존의 아귀다툼으로 소란스러운 풍진세상, 불꽃처럼 생동하는 비감한 세계
시인은 그 우주 안에서 꽃, 나무, 벌레, 새 들이 매일 아침 여기저기 탄생의 소란스러움을 벌이고 “수많은 불빛들이 명멸”(「미시령 지나며」)하는 것을 목도한다. 그에게 우주의 탄생과 소멸과도 같은 운명을 지닌 세상은 “반짝반짝 빛나는 수천 수만 별들의/ 대군중집회”( 「표절」 )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고, 물 나간 사이 육지와 바다의 국경이 잠깐 열려 “생존의 그 소란스러운 아귀다툼”(「갯벌」)이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며, “수백, 수천의 개미들이 떼를 지어/ 흙 위를 부지런히 바자니고”(「개미」) 있는 곳이기도 하다. 비단 자연의 삶만이 아니다. 인간의 삶 또한 홀로 타오르는 들꽃의 운명, 밤이 오면 스러지는 노을의 운명을 따른다.
타박타박 들길을 간다. 자갈밭 틈새 호올로 타오르는 들꽃 같은 것, 절뚝절뚝 사막을 걷는다. 모래바람 흐린 허공에 살폿 내비치는 별빛 같은 것, 헤적헤적 강을 건넌다. 안개, 물안개, 갈대가 서걱인다. 대안(對岸)에 버려야 할 뗏목 같은 것, 쉬엄쉬엄 고개를 오른다. 영(嶺) 너머 어두워지는 겨울 하늘 스러지는 노을 같은 것, 불꽃이라고 한다. 이슬이라고 한다. 바람에 날리는 흙먼지라 한다. —「생이란」
시인은 들길을 걷고 사막을 지나 강을 건너며 고개를 올라, 들꽃과 별빛과 뗏목과 노을의 운명을 비감하게 마주하며 그 모든 것들을 지켜본다. 태어나고 사라지는 생명의 운명,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지닌 숙명, 바로 생(生)이란 “불꽃”이자 “이슬”이고 “바람에 날리는 흙먼지”처럼 우리 곁에 늘 끊임없이 생동하는 불변의 진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숙명을 초월하는 곳에 울려 퍼지는 우주의 잔잔한 박수 소리
죽음(소멸)의 숙명을 필연적으로 따라야 하는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문득 “돌아보면 고단한 삶”( 「오동 잎 」 )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인이 보기에 인간이 겪는 온갖 시련과 역경은 존재의 완전한 소멸로 끝나 버리는 과정으로서의 행보가 아니다. 작은 물방울이 “샘에서 태어나 바다로 가는 길”(「댐」)을 따르듯이 그것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키기 위한, 그를 통해 또 다른 삶을 살아 나가기 위한 생명의 숭고한 숙명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의 시선이 올곧게 내려앉는 세상에서는 “모든 추락하는 것들이/ 거듭”나기 때문이다.(「그렇지 않더냐」) 산다는 것은 눈동자에 영롱한 진주 한 알을 키우는 일이다.
땀과 눈물로 일군 하늘 밭에서 별 하나를 따는 일이다. (중략) 산다는 것은 손 안에 꽃 한 송이를 남몰래 가꾸는 일이다. 그 꽃 시나브로 진 뒤 빈주먹으로 향기만을 가만히 쥐어 보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그래도 산다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에서
시인의 말대로 “스스로 깨짐 없이 이루어지는 생명”( 「새 11」 )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새들은/ 누군가가 이미 낸 길은/ 가지 않는다.// 새들은/ 길 아닌 길도 길임을 아는 까닭에/ 결코/ 뒷걸음을 치지 않는다.” (「새 2」) 새들은 나침반이나 등불이 없는데도 “깜깜한 밤하늘”(「새 3」)을 날아간다. 생명을 지닌 개체로서 생의 숭고한 숙명을 두려워하거나 외면하기보다는 ‘새’들의 마음으로 살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또 하나의 새로운 우주의 탄생이라는 삶의 신비와 기쁨을 오롯이 품어 안을 수만 있다면 “멀리 마른하늘에서/ 우주의 잔잔한 박수 소리”(「우렛소리」)가 들려올지 모른다.
■ 작품 해설 중에서오세영 시인은 비루한 현상의 세계에서 별들의 아득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 현상의 세계와 별들의 아름다움을 일치시킴으로써 진리의 유효성을 보여 준다. 선한 것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은 진정한 것이다. 진정한 것은 오직 이 생명의 형식 속에서, 생명의 형식을 담는 언어 속에서 드러난다. 고전주의자로서의 신은 낮은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언어가 내포한 우주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 신은 여전히 “먼 하늘 은핫물을 펜 끝에 촉촉이 찍어/ 또박또박 한지에 글씨를 쓴다.” 그것은 “한생의 일기”이자 한 줄의 서정시. 먼 하늘의 물빛이 스며든 이 일기를 읽으며 우리는 아득한 생명의 우주를, 살아서 죽는 것들의 비감한 운명을 손끝으로 느낀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번지는 시인의 사랑이 여기에. —박슬기(문학평론가)
■ 추천의 말오세영 시인은 자신의 시를 통해 사물의 모순 구조를 초월하여 도달할 수 있는 조화의 세계를 꾸준히 꿈꾸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의 작품 세계 자체가 한편으로는 사물의 세계에 내재하는 모순 구조의 실체에 접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모순 구조를 내적으로 극복하여 도달할 수 있는 조화의 세계를 그려 내고자 한다. 특히 최근에는 대상으로서의 사물을 관조하는 은일(隱逸)과 정관(靜觀)의 세계를 보여 주는 작품들이 많이 있다. 이 관조의 세계에서는 모든 사물들이 서로 맞물려 나름대로의 질서와 조화를 보여 준다. 이 새로운 세계의 발견은 시적 주체의 자기 초월을 통해 확립된 것이다. 나는 이것을 삶에 대한 자기 초월을 통해 이루어 낸 조화와 정일(靜逸)의 세계라고 말하고 싶다. —권영민(문학평론가・단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