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원제 Who’s Afraid of Virginia Woolf?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10년 5월 31일 | ISBN 978-89-374-6247-4
패키지 반양장 · 변형판 132x225 · 220쪽 | 가격 9,000원
시리즈 세계문학전집 247 | 분야 세계문학전집 247
유진 오닐, 테네시 윌리엄스, 아서 밀러를 잇는 현대 미국의 대표 극작가 올비비상식적 언어유희, 노골적인 언어폭력으로 들춰내는 미국적 이상의 허위거침없는 회의와 비판 속에서도 소통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 낙관적 부조리극
▶ 에드워드 올비는 이 시대 연극계의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하나이다. — 《뉴욕 포스트》▶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는 미국 연극계의 중요한 사건이다. 어떤 희곡도 그 위치를 넘보지 못한다. — 《뉴욕 타임스》▶ 연극계에는 결국 산 것과 죽은 것, 두 가지밖에 없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는 충격적일 정도로 펄펄 살아 날뛰는 작품이다. — 《타임》
현존하는 미국의 가장 위대한 극작가라 불리는 에드워드 올비의 대표작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247)으로 출간되었다. 폭력적인 대화와 극단적인 상황 전개를 통해 미국적 이상의 허위와 환상으로 포장한 삶의 이면을 거침없이 드러낸 이 작품은 사회적으로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키며, 당시 신예였던 올비를 단숨에 미국의 대표 극작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1963년 토니상과 뉴욕 극비평가상 등을 수상한 이 작품이 2004~2005년에 브로드웨이에서 재상연되면서, 올비는 극작가로서의 평생 업적을 기리는 토니상 특별상을 수상하였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는 사실주의극의 무대 위에서 삶의 부조리함을 여과 없이 보여 주면서도 끝내 소통의 가능성을 놓지 않는 낙관적인 미국식 부조리극의 전형이다.
■ 미국적 삶의 이상에 과감히 이의를 제기한 문제작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는 1963년 10월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면서 대중과 연극계 모두로부터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올비는 같은 해 토니상과 뉴욕 극비평가상을 수상했고, 주연 배우들 역시 토니상 최고 배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기록했다. 올비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작가에서 미국의 위대한 대표 극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를 유진 오닐, 아서 밀러, 테네시 윌리엄스와 같은 급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부부의 이름을 딴 조지와 마사는 모든 것이 행복하고 안정된 미국적 삶의 허상 뒤에 자리한 불행과 불안정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끝나지 않는 술판과 도를 넘는 말싸움으로 점철되는 상류층 부부의 부조리한 삶에서 가장 의미 있는 연결고리는 그들이 키우는 아들이다. 그러나 극의 종반부에서 아들은 그들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낸 가공의 존재임이 밝혀진다. 한편, 그들을 방문한 닉과 허니는 공익광고에 나올 법한 모범적인 부부처럼 보인다. 닉은 성공에 대한 야망과 정열이 넘치는 젊은 교수이고 허니는 예의바르고 순종적인 아내이다. 그러나 극이 진행되면서 그들이 연기한 완벽한 결혼 생활의 환상에 금이 간다. 닉은 그저 허니의 상상임신에 속아, 그리고 그녀의 재산에 혹해 결혼을 했다는 것이 밝혀지며, 허니는 남편이 자신을 속이고 마사와 부정한 관계를 맺는 것을 외면하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불행한 진실들을 회피하기 위해 술에 의존한다. 올비는 이들을 통해 이상적인 미국적 삶의 허와 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박식한 인텔리 부부들의 천박한 본모습과 불편한 진실을 노골적으로 보여 주면서, 당시 모든 미국인들이 굳게 믿고 있던 아메리칸드림이 실은 그렇게 견고하지 않으며 하룻밤 술판에도 밑천이 드러나는 얄팍한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묻는 것이다. 사실상 거대 권력에 의해 조작된 환상인 미국적 삶의 이상에 과감히 딴죽을 거는 이 문제작은 오늘 우리의 현실에도 일침이 된다.진창 같은 삶에서 유일하게 의미를 지니고 있던 것이 환상에 불과했다는 설정을 통해, 이 작품은 삶의 무의미성을 냉정하게 역설한다. 환상을 걷어 낸 후 마주할 수 있는 진실이 무의미함뿐인 우리의 삶은 마사의 말마따나 궁극적으로 “슬프고, 슬프고 슬픈” 것이다. 이제 조지와 마사는, 그리고 우리는 숨어들 수 있었던 유일한 환상으로부터 발가벗겨진 채 잿더미 같은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는 이처럼 거침없는 회의와 비판으로 당시 미국 사회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키며, 끊이지 않는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일부 관객들은 작품 속의 거친 언어와 금기시되는 성적 표현들에 충격을 받았고, 도착적이고 추잡스럽다는 비난을 던지기도 했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는 1963년에 심사위원들에 의해 퓰리처상 희곡 부문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퓰리처 위원회에서 이 작품이 신성 모독과 성적인 주제를 이용해 시대적인 논쟁을 일으키는 것에 유감을 표하며 “미국적 삶의 ‘건전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다.”라는 이유를 들어 수상을 취소했다. 결국 그해 퓰리처상 희곡 부문에는 수상작이 없었고, 그 와중에 절반이 넘는 퓰리처상 희곡 부문의 심사위원이 항의 사퇴하는 촌극이 빚어진 것도 유명한 일화다.
■ 사실주의극과 부조리극이 만난 미국식 부조리극
올비는 초기작 「동물원 이야기」를 비롯해 사실주의와 부조리주의를 성공적으로 조화시킨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역시 일반적인 가정의 거실이라는 공간에서 실제로 있을 법한 인물들이 소통 가능한 방식으로 논쟁을 벌인다는 점에서 사실주의의 토대 위에 있으나, 극의 진행에 따라 점차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부조리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심각한 문제들이 풍자적인 우스개와 뒤섞여 새로운 효과를 만들어 내는 희비극의 스타일은 부조리극에서 잘 차용하는 방식으로, 올비도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에서 이를 활용하고 있으며, 우리 삶에 궁극적인 의미는 없다는 부조리극의 주제 의식도 작품에서 잘 드러내 보인다. 부조리극의 대표 작가 사뮈엘 베케트는 버지니아 울프와 더불어 올비에게 가장 중요한 영향을 준 작가이기도 하다.유럽의 부조리극은 해피엔딩이라고 할 만한 결말을 맺는 경우가 거의 없다. 예컨대,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등장인물들은 의미 없는 기다림을 끝없이 반복할 뿐이다. 그러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의 인물들은 상상의 아들을 하염없이 기다린다거나 이해할 수 없는 대화만 반복하다 극을 끝내지는 않는다. 조지와 마사는 노골적으로 서로를 모욕하고 맹렬한 싸움을 계속하는 가운데 자신들이 숨어 있는 환상을 점진적으로 약화하고 절정에 이르러 자신들이 만들어 낸 아이의 허상을 스스로 죽여 없앤다. 고통스러운 현실의 반작용과 같은 취기와 혈전의 반복에 매여 있던 그들은 결국은 자신들의 환상을 지워 냄으로써 자유를 얻은 것이다.긴 싸움 끝에 동이 트고 조지는 마사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유일하게 의미를 지니고 있던 환상이 사라지면서 그들은 발가벗겨진 채 냉혹한 현실 앞에 서게 되었지만, 적어도 이들의 삶이 다시금 거짓 이야기로 점철되지는 않을 것이며, 두 사람이 함께 현실과 맞설 것이라는 희망이 보인다. 작가는 이 작품이 죽음과 삶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하였으며, 궁극적으로 조지와 마사의 사랑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미국의 꿈이라는 허상에 대한 지독한 비판이면서도, 관계 속의 소통을 끈질기게 희망하는 미국적 낙관주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누가 왜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는가?
올비는 정확히 이 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극중에서도 버지니아 울프가 인물로서 거론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 왜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는 것일까?버지니아 울프는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유명한 작가이다. 그녀는 등장인물들의 눈 뒤에서 회오리치는 감정적인 진실들을 보여 주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올비처럼 상류 지식인이었던 그녀는 작품 속에서 종종 자신의 사회적 동류들이 쓰고 있는 허식의 이면을 벗겨 내고 이를 거칠게 비난한다. 그녀가 진실, 가면 벗기기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사실을 통해, 올비가 어느 인터뷰에서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라는 제목이 ‘누가 거짓 환상 없는 삶을 두려워하랴?’라는 질문의 다른 모습이라고 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극은 누가 환영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두려워할 것인가 하는 제목의 질문에 대해 마사가 “내가…… 조지…… 내가…… 두려워…….” 하고 대답하는 것으로 끝난다. 사실상 ‘드러냄’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을 두렵게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허울 아래에는 삶이라고 할 만한 의미 있는 무언가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쉽사리 허울을 벗어 던질 수 없는 것이다.한편, 이 작품이 부조리주의를 토대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제목의 의미를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부조리주의자들은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 삶에서 우리가 의미를 창조하는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는 무의미하고 불합리하다고 말한다. 올비에 따르면, 이 극의 제목은 디즈니의 만화 「아기 돼지 삼형제」에 나오는 주제가 제목인 「누가 커다란 나쁜 늑대를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Big Bad Woolf)」를 비슷한 발음으로 패러디한 단순한 농담에서 비롯되었다. 극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종종 이 패러디 노래를 부르지만, 그 맥락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웃지만, 대체 뭐가 재미있는 건지 의문스럽다. 결국 이 제목은 관객들이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농담이다. 고의적으로 어떤 의미를 제거한 부조리한 농담일 수도 있고, 우리가 때때로 시답잖은 농담 속에서 의도하지 않은, 급소를 찌르는 의미를 얻는 것과 같은 효과를 기대한 것일 수도 있다. 어떻든 이것은 끝내 그 의미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대단한 농담이다. 그 자체로 삶의 부조리한 단면을 꿰뚫어 보여 주기 때문이다.
1막 재미난 게임·11
2막 발푸르기스의 밤·77
3막 귀신 쫓기·149
작품 해설·195
작가 연보·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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