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근본주의자가 펼쳐 보이는, 소설처럼 흥미로운 언어의 세계
이것은 ‘사건의 시학’이자 ‘시학의 사건’이다
2000년대 중반 한국 시단을 뜨겁게 달군 미래파 논쟁의 한가운데 있었던 시인 김언이 4년 만에 세 번째 시집을 들고 돌아왔다. 주목받는 젊은 시인들 중에서도 하나의 극점을 이룰 만큼 언어 탐구에 몰두해 온 시인 김언. 그가 선보이는 이번 시집의 제목은 엉뚱하게도 ‘소설을 쓰자’이다. 시집 『소설을 쓰자』는 독자들에게 시의 근원에 대한 질문과 더불어 시에서 가장 먼 곳의 물음을 함께 던진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 ‘시란 무엇인가?’와 가장 넓은 범위에서 ‘시란 무엇인가?’란 질문이 함께 내장된 시집 『소설을 쓰자』는 소설처럼 흥미로운 언어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 가장 은밀한 소통을 꿈꾸는 시
『숨쉬는 무덤』에서 뛰쳐나온 『거인』, 즉 유령이 부르는 노래가 이러할까. 시인 김언이 4년 만에 기괴한 제목의 세 번째 시집을 들고 돌아왔으니, 이름하여 『소설을 쓰자』.
이번 시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 시들을 블로그에 올려도 댓글 따위는 달리지 않을” 것이며, “하루에 세 편 이상 읽으면 사용자의 머리가 과열되어 폭발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런데도 읽을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이 시집, 점점 궁금해진다.
신형철은 ‘김언 시집 사용 설명서’라는 부제를 단 해설로 이제 막 출시한 전자 제품을 소개하듯 친절하게 김언의 시 세계를 풀어 나간다. 그것은 일찍이 “번역 불가능한 문장”(이장욱), “안티고네의 노래─낯선 시간을 호출하는 목소리들”(함돈균) 중 하나로 평가받으면서 단순히 난해한 시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는 김언의 시에 대한 적극적인 해명 작업이기도 하다.
김언은 세계와 존재와 언어의 원리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시인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자 하고, 소통할 수 없는 것들과의 소통을 꿈꾼다. 그의 시는 소통을 거부하는 시가 아니라 가장 은밀한 소통을 꿈꾸는 시다. 마치 연인과 나누는 밀어처럼 은은한 소통에 헌신하는 시. 그의 시는 또한 흔히들 표준 문법이라고 부르는 억압적인 언어활동에서 자유로운 발화를 꿈꾸는 시이다.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언(言)’이라 지을 만큼, 세계를 바꾸는 일은 언어를 바꾸는 일에서 시작돼야 한다고 믿는 시의 근본주의자다운 세계관이 한 편의 시로 완성되고 또 완성되어 모인 것이 이번 시집인 것이다.
신형철의 표현대로 김언의 이번 시집은 “소통의 근거를 심문하고 문법의 제약을 유린하면서 시(삶) 속에 억압돼 있는 사건들을 깨우려는 물건”이지만, 그것은 한편으로 즐거움을 동반한 ‘발견’이자 ‘발명’으로 우리의 독서를 유혹한다. 언어 자체에 대한 김언 식의 고집스러운 탐구가 그 즐거움을 엿볼 수 있는 한 축을 이룬다면, 다른 한 축에는 가히 발견과 발명으로 건축해 놓은 ‘사건의 세계’가 자리 잡고 있다.
■ 사건의 시학이자 대화의 시학, 그리고 유령의 언어
김언은 “말이 사건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유별나게 주목하면서, 바로 거기에서 현대 시의 새로운 가능성 중 하나를 찾으려 한다.”(신형철) 언어로부터 비롯된 ‘사건의 시학’이기에 그것은 ‘대화의 시학’이면서 또한 무한히 미끄러지고 빠져나가는 ‘유령 언어의 시학’이기도 하다. 이번 시집에서 상당수를 차지하는 대화 형식의 시들(「헬렌, 무엇이 들립니까?」, 「톰의 혼령들과 하품하는 친구들」, 「당신은」, 「두 도시 이야기」, 「서울에서 가장 우울한 남자의 왕」, 「벤치 이야기」 등)과 유령의 언어로 점철된 시들(「톰의 혼령들」, 「톰의 혼령들과 하품하는 친구들」, 「서울에서 가장 우울한 남자의 왕」 등)이 서로 겹치고 섞이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시에 그토록 많은 입들이 등장하고, 그토록 많은 ‘문장’이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는 까닭을 그는 다시, 독자로 하여금 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이어서 생각해 보게 만든다. 과연 시란 무엇일까?
김언의 시에서, 시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은 언어에 대한 극단적인 탐구와 다르지 않으며, 그것은 시의 영역에 대한 발본적인 탐색과 다르지 않다. 시의 근원주의자가 새삼스럽게 ‘소설을 쓰자’라는 제목으로 시집을 선보이는 이유도 거기서 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실제로 소설을 쓰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다른 시’를 쓰겠다는 뜻이다. 시의 가장 뿌리 깊은 매력(언어)과 시의 가장 먼 곳(소설)에서 오는 모험을 함께 묶어 놓은 시집 『소설을 쓰자』는 우리가 흔히 시에서 기대하는 아름다움과는 다른 매혹을 선사한다.
경계에 대한 강박을 지우고 이 시집을 읽어 나가다 보면, 어느새 유령이 다가와 말을 걸 것이다. “여기가 어디니?” 그리고 곧 모든 것이 그의 문장이 될 것이다. 이 시집을 읽는 당신도.
■ 작품 해설 중에서
김언은 사건이라는 개념에 많은 판돈을 걸었다. 말이 사건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유별나게 주목하면서, 바로 거기에서 현대 시의 새로운 가능성 중 하나를 찾으려 한다. 모든 게 명쾌하지만 창조적인 자극이라고는 없는 ‘수사 결과 발표’ 같은 시 말고, 많은 것들이 수수께끼이지만 ‘여기에서 무슨 일인가 벌어졌다’는 것을 강하게 환기하는 ‘사건 발생 현장’ 같은 시. 그래서 이 시집을 읽는 일은, 우리가 흔히 시에서 기대하는 아름다움과는 좀 다른 매혹에 도달하기 위해 한 예외적인 시인이 시도한 도발적인 모험에 동참하는 일이다. 그가 계속 전진한다면, 이 ‘사건의 시학’은 언젠가 ‘시학의 사건’이 될 것이다. —신형철(문학평론가)
■ 추천의 말
김언의 시는 시가 사물과 사건을 재료로 삼는다고 생각하는 시인들에게는 하나의 경종이다. 그는 시적 사유를 언어철학자처럼 전개한다. 그의 ‘언어 게임’ 안에 들어가면 우리가 말과 노래라는 “자신을 공개하지 않”는 독재자의 치세 속에서 지금껏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그곳에서 문장을 먹었고, 문장을 살았고, 문장을 유전했다. 그러나 그곳은 언어라는 표상 체계와 현실 세계 사이의 간극을 들여다보지 않은 가짜 세계였다. 그리하여 시인은 시간과 공간, 각자의 취향, 대화와 상상, 경험과 현상, 사건, 감각, 의미 생산, 작품들 속의 오브제 전부를 회의해 본다. 언어와 세계의 관계를 떼어 놓거나 뒤집어 버리거나 문장의 주체를 바꾸거나 시제를 도치한다. 그는 언어와 물상 사이에 끼여서 숨이 막히는 시를 살아 내기 위해 대문자 언어를 고통스럽게 유희한다. 그러자 우리가 언어 세상의 주인공의 자리에서 미끄러지고, 시 언어의 공간이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언어 세계를 넘어선 자연스러운 자유 세계가 저절로 암시된다. —김혜순(서울예대 문창과 교수․시인)
김언의 시는 감정적으로 흐트러진 적이 없다. 그는 지적이면서도 치열한, 뼛속까지 모던한 시인이다. “중요한 문장들이 마침표를 찍어” 가며 정교하게 조직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 말의 파장이 그리는 포물선을 “미세하게 저울질”하는 언어적인 결벽성은, 김언의 초기 시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그의 시편마다 숨 쉬고 있다. 왜 그의 이름이 ‘言’인지를 짐작케 한다. 섬세한 성찰로부터 시작하는 그의 시는 한 편의 선언과 같은 매혹적이고 강렬한 언어로 우리의 약한 곳들을 회색 톤으로 두텁게 채색한다. “누군가가 죽었다면 그건 나의 혀가 잘못 발음됐기 때문”이라는 완벽주의적인 언어 세계 속에서도 뜨거운 “심장은 이미 예약되어 있다”. 그의 시를 읽으며 아름답게 타오르는 “사건의 일부”가 되는 것은 우리에게 흥미로운 충격요법으로 다가온다. “사건 다음에 문장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문장 다음에 사건이 생”기는 것이다. —정재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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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 | 2015.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