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시리즈 세계문학전집 382 | 분야 세계문학전집 382, 외국 문학
“나는 오직 이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태어났다.”
『사양』, 『인간 실격』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출현을 예고한 첫 창작집
흔들리는 존재를 끌어안는 영원한 청춘 문학
▶다자이 오사무는 훌륭한 스토리텔러다. ─《북리스트》
▶『만년』에는 이후 다자이 문학의 가능성을 알리는 요소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오쿠노 다케오(문학 평론가)
▶그는 마흔이 되어서도 여전히 불량소년이라, 불량청년도 불량노년도 될 수 없는 남자였다. ─ 사카구치 안고(소설가)
▶작품의 배경은 상당히 우울하지만, 『만년』은 결코 어둡고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고뇌하는 청춘이 녹아 있는 까닭이다. ─ 유숙자(옮긴이)
다자이 오사무의 첫 창작집 『만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2번으로 출간되었다. 1997년 소화출판사에서 같은 역자가 문고본으로 출간했던 것을 이십사 년 만에 완역했고 기존 번역도 전면적으로 손보았다. 유숙자 역자는 “거의 산문시에 가까운 문장들이 작품 곳곳에 섞여 있고, 한 편의 시나 다름없는 작품도 있”어 오늘날의 감각에 맞게 문장의 길이, 단어의 품사, 어투까지 세심하게 다듬으며 작가 특유의 리듬감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만년』에는 죽음을 각오한 이십 대 초반의 작가가 유작을 염두에 두고 집필한 열다섯 편의 단편이 실렸다. 외로웠던 유년기 그리고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을 담은 자전 소설 「추억」, 다자이 오사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최초의 작품 「열차」, 한 여성과 투신자살을 기도한 뒤, 혼자 살아남은 죄의식이 투영된 「어릿광대의 꽃」, 최선을 다할수록 오히려 실패와 좌절을 맛보는 세 인물의 희비극으로 당시 청년들의 자포자기 심정을 희화화한 「로마네스크」 등이다.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좌익 운동에 가담하면서 태생적인 모순을 안게 된 다자이는 고향 생가와의 불화, 그에 따른 생활고, 자살 기도 후 동반 여성만이 죽은 데 대한 죄책감 등 자신의 젊은 날을 뒤흔들었던 일련의 사건과 관계 들을 솔직하고 시적인 언어로 표현했다.
■ 2021년, 가장 사랑받는 고전 작가
다자이 오사무
2020년이 카뮈와 오웰이었다면 2021년은 다자이 오사무다. 고전 독자들의 관심사를 한눈에 알 수 있는 바로미터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판매 추이를 살펴보면(2021.01~06), 코로나19가 전 세계적 문제로 대두되던 작년 같은 시기, 카뮈의 『페스트』가 판매 1위를 차지했고 ‘감시 사회’라는 키워드를 제시한 오웰의 『1984』 역시 5위로 급등하며 고전 독서의 시의성을 증명했다. 한편 올해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이 연초부터 판매 1위를 지키고 있다. 2021년 7월 6일 현재 교보문고, YES24, 알라딘 등 대형 온라인 서점의 소설 차트에서도 민음사의 『인간 실격』이 높게는 7위 낮게는 14위를 기록하고 있는데, 고전 작품으로는 단연 독보적인 순위다.
다자이 오사무는 일본 동북 지방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가진 자로서 못 가진 자에 대한 부채 의식을 평생 무겁게 느꼈다. 이로 인해 도쿄 제국 대학에 진학한 후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기도 하지만 경제적 열쇠를 쥐고 있던 고향 본가와의 갈등으로 생활고가 심해지자 좌익 운동을 그만두는 등 모순적인 태도를 취하며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2021년 ‘다자이 오사무’ 열풍은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는 데 따른 청년 불안의 증거일 뿐만 아니라 ‘공정’, ‘정의’ 등 MZ 세대를 설명하는 키워드를 가장 솔직하게 표현한 고전 작가에게 독자들의 인정과 애정이 투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청년 다자이의 못 다 이룬 꿈
아쿠타가와상은?
작가를 꿈꾸던 학창 시절, 다자이 오사무는 『라쇼몬』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유독 존경했다. 신인 작가에게 주어지는 ‘아쿠타가와상’은 그런 그에게 꼭 이루고 싶은 목표였다. 1935년 그는 「역행」(『만년』에 수록)으로 그해 처음 생긴 아쿠타가와상에 도전하지만 차석에 그치고 만다. 이때 선고 위원이었던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이 작품을 두고, “작가는 현재 생활에 어두운 구름이 끼어 있어, 재능을 있는 그대로 발산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라고 사생활에 대해 평가하자, 이에 대해 다자이가 「가와바타에게」라는 글을 써서 “새나 키우고 무용이나 보는 것이 그렇게 훌륭한 생활인가.”라고 응수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듬해 그는 『만년』으로 다시 한번 아쿠타가와상에 도전하지만 ‘이미 후보작으로 지명되었던 작가는 선고 대상에서 제외한다.’라는 규정이 생기면서 후보조차 되지 못한다. “부디 저에게 아쿠타가와상을 주십시오. 바라는 것은 일절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간절히 수상을 원했던 다자이. 기성 문단의 권위적인 평가에 반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누구보다 인정받기를 원했던 그의 모순된 태도는 세상과 타인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들을 포기할 수 없었던 청년 다자이 오사무의 내면을 보여 준다.
■ 백 편의 습작을 거쳐 완성한
다자이 오사무 문학의 원형들
“나는 이 단편집 한 권을 위해 십 년을 허비했다. 만 십 년, 보통 시민과 마찬가지로 산뜻한 아침 식사를 하지 못했다. (……) 백 편이 넘는 소설을 찢어 없앴다. 원고지 5만 매. 그리고 남은 건 겨우 이것뿐이다. 이것뿐.” ―《문예잡지(文藝雑誌)》(1936년 1월호)
『만년』은 당대 일본의 리얼리즘 지향적 문학과는 다른 새로운 현대 문학의 가능성을 탐색한 선구적 작품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인정받고 있다. 단편 「어릿광대의 꽃」은 작가가 좌익 운동을 하다 한 여성과 바다에 투신자살을 기도한 뒤 혼자 살아남은 죄의식이 반영된 작품으로, 주인공 ‘오바 요조’ 외에 ‘나’라는 작가의 자의식이 개입하여 작품 전체의 흐름을 간섭하고 비평한다. 이 이원적 방법에 의해 말하기 힘든 진실을 표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가장 전위적인 현대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사토 하루오,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 당대 지식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이후 전개될 다자이의 문학 세계를 엿보게 하는 데 있어서도 『만년』의 가치는 충분하다. 고향 쓰가루의 ‘이타코’라 불리는 무녀의 말투, 혹은 작가가 한때 푹 빠져 배우기도 한 에도 시대 이야기체 노래 ‘기다유(義太夫)’의 영향을 받은 음악적인 멜로디는 작가 특유의 ‘말하는’ 언어를 완성시켰다. 이뿐만 아니라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이야기를 건네는 듯한 ‘내레이션 기법’은 내면으로 침잠하는 자기 고백적 서사에 설득력을 더하며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강력한 흡인력을 지닌다.
■ 『사양』, 『인간 실격』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청춘의 노래
다자이 오사무는 1909년에 태어나 삼십구 년의 짧은 생을 살다간 작가로 『만년』은 이십 대에 발표한 초기작, 『사양』과 『인간 실격』은 각각 세상을 뜨기 일 년 전과 세상을 뜬 그해 발표한 후기작이다. 1935년 맹장염 수술 후 복막염을 일으켜 중태에 빠졌던 작가는 회복기에 진통제로 사용했던 파비날에 중독된다. 결국 이듬해 파비날 중독 치료를 위해 정신 병원에 수용되는데, 아내와 스승 이부세 마스지가 자신을 속이고 입원을 시킨 데 큰 충격을 받는다. 이때 경험한 극도의 인간 불신과 자조적 태도는 『인간 실격』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주요한 모티프가 되었다. 여기에 패전 후 일본의 실망스러운 사회상에 대한 인식이 더해져 『만년』에서 시작된 작가의 개인적 절망이 공적, 사회적 좌절로 승화된다.
한편 『사양』은 ‘다자이 문학’ 하면 으레 떠올리게 되는 파멸적인 세계관과 달리 희망적인 빛을 품고 있다. 태평양 전쟁 중에 가족을 데리고 아오모리현 쓰가루에 있는 생가로 피란을 떠났던 작가는 그곳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전후 새로운 농지 개혁이 발표되면서 대지주였던 쓰시마 집안은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고, 그 모습을 지켜본 작가는 체호프의 『벚꽃 동산』을 떠올리며 『사양』을 구상했다. 하지만 실제 작품 전개는 『벚꽃 동산』과 달랐다. 시대의 격변을 딛고 꿈을 쟁취하며 당당하게 현실을 헤쳐 나가려는 젊은 여성의 의지에 무게 중심이 실렸기 때문이다. 『만년』에 비친 다자이 오사무의 작가로서의 자기 구원, 죽음을 각오했기에 역설적으로 삶 앞에 가장 성실한 한 인간의 모습은 『사양』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통해 만개한다.
■ 본문 중에서
죽을 생각이었다. 올해 설날, 옷감을 한 필 받았다. 새해 선물이다. 천은 삼베였다. 회색 줄무늬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여름에 입는 옷이리라. 여름까지 살아 있자고 생각했다. (7쪽)
“죽는 게 제일 나아. 아니, 나뿐만이 아냐. 적어도 사회 진보에 마이너스 역할을 하는 녀석들은 전부 죽는 게 나아” (14쪽)
보름달 저녁. 반짝이다 무너지고, 넘실대다 무너지고, 용솟음치고 몸부림치는 파도 속에서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 붙잡은 손을 견디다 못한 내가 일부러 뿌리쳤을 때, 여자는 순식간에 파도에 삼켜지며 드높이 이름을 불렀다. 내 이름은 아니었다. (16쪽)
아침에 학교로 가기 전 내 책상 위에 트럼프를 늘어놓고 그날 하루의 운명을 점쳤다. 하트는 대길(大吉)이었다. 다이아몬드는 반길(半吉), 클로버는 반흉(半凶), 스페이드는 대흉(大凶)이었다. 그리고 그 무렵은 거의 날마다 스페이드만 나왔다. (46쪽)
큰형은 내가 문학에 열광하는 걸 염려해, 고향에서 긴 편지를 보내왔다. 화학에는 방정식이 있고 기하학에는 정리(定理)가 있어서 그걸 해석하는 완전한 열쇠가 주어지지만 문학에는 그게 없다. 허용된 연령, 환경에 도달하지 않으면 문학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딱딱한 어조로 쓰여 있었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나는 내가 그 허용된 인간이라고 믿었다. (55쪽)
만약 이 한 줄 때문에 내 소설이 실패하고 말았다 해도, 나는 마음 약하게 그걸 지워 없앨 생각은 없다. 과시하는 김에 한마디만 더. 그 한 줄을 지우는 일은 오늘까지의 내 생활을 지우는 일이다. (126쪽)
“일어나! 사건이야!” 그들은 사건을 날조하길 즐긴다. “요짱의 대(大)포즈.” 그들의 대화에는 ‘대’라는 수식어가 번번히 사용된다. 지루한 이 세상에 뭔가 기대할 만한 대상을 원하기 때문이리라. (129쪽)
한밤중 화장실에 가다가, 복도에서 같은 숙소에 묵은 젊은 여자와 마주쳤다. 그뿐이다. 그러나 이게 대사건이다. 고스게로서는 잠깐 스쳐 지났을 뿐일지라도, 그 여자에게 자신의 예사롭지 않은 인상을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딱히 어떻게 하겠다는 심산도 없지만, 그 스쳐 지나는 순간에 그는 목숨을 내던져 포즈를 취한다. 인생에 진지하게 뭔가 기대를 갖는다. 그 여자와의 모든 경위를 한순간 이리저리 상상하고서, 가슴이 터질 듯한 느낌이다. 그들은 이처럼 숨막히는 순간을,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경험한다. 그래서 그들은 방심하지 않는다. (132쪽)
노인은 아니었다. 스물다섯을 넘겼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역시 노인이었다. (197쪽)
“흉내를 내요, 그 사람. 그 사람에게 의견 따위 있을 리가 없죠. 죄다 여자한테 영향을 받았어요. 문학소녀 때는 문학. 도시 사람 때는 맵시. 뻔해요.”
“설마. 그런 체호프 같은.”
이렇게 말하고 웃었지만 역시 가슴이 미어졌다. 지금 여기에 세이센이 있다면, 그의 가녀린 어깨를 꼭 안아 주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258쪽)
사물의 이름이란 그게 어울리는 이름이라면 굳이 묻지 않더라도 절로 알게 되는 법이다. 나는 내 피부로 들었다. 멍하니 물상을 응시하고 있노라면, 그 물상의 언어가 내 피부를 간지럽힌다. 예를 들면, 엉겅퀴. 나쁜 이름은 아무런 반응도 없다. 여러 번 들어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던 이름도 있다. 예를 들면, 사람. (296쪽)
잎 7
추억 25
어복기(魚服記) 73
열차 84
지구도(地球圖) 90
원숭이 섬 101
참새 112
어릿광대의 꽃 117
원숭이 얼굴을 한 젊은이 174
역행 197
그는 옛날의 그가 아니다 216
로마네스크 262
완구 292
도깨비불 300
장님 이야기 324
작품 해설 335
작가 연보 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