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린 서늘한 궤적 위
‘고백’으로만 가능한 찰나의 순간들
고통과 사랑을 시라는 형식에 담아 기록해 온 최문자의 여덟 번째 시집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가 ‘민음의 시’ 255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훔친 것들’을 아무도 모르게 숨겨 둔 외로운 이처럼, 덤덤하게 삶을 풀어 놓으면서도 때때로 고백과 비밀, 죽음과 참회 들이 터져 나오도록 둔다. 오랫동안 품어 왔던 비밀을 털어놓고, 일생 동안 사랑했던 이가 죽음을 맞이하는 ‘끝’의 순간들로부터 시인은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상실과 불안을 여유롭게 부려 내며 촘촘히 짜인 시의 격자는 어떤 것도 헐렁하게 빠져나가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우리는 그 안에 단단히 붙잡힌 채, 슬픔과 참혹함이 지나가며 남기는 흔적들을, 그것들이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이어지는 시간의 궤적을 가만히 바라본다.
■ 고백의 실천성
고백은 나의 벽돌로 만든 나의 빨간 지붕이 달린 아직 아무도 열어 보지 못한 창문 같기도 하고 창문 아래 두고 간 그 사람 같고 내 앞을 떠나지 못하는 슬픔 같고 흰 구름 같고 비바람 불고 후드득 빗방울 날리는 것이 눈보라 같아서 내 몸 같아서 나는 고백할 수 있을까?
―「고백의 환(幻)」에서
고백은 그 행위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수백 번 주춤거리게 하는 소극적인 말이면서도, 발화되었을 때 무엇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말이다. 고백은 긴 망설임의 끝에 오며, 그로부터 또 다른 삶이 펼쳐질 시작점이다. 그리하여 고백은 순간과 순간의 사이에 위치하지만 그 자체로 강렬한 하나의 순간이며 사건이다. 이 시집에는 ‘고백’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최문자의 시적 화자들은 늘 고백을 그리워하고, 그 앞에서 충분히 망설인 뒤, 마침내 수행한다. 관록의 시인이 삶의 면면에서 채취한, 고백으로만 가능한 찰나적 순간들이 한 권의 시집이 되어 우리에게 왔다.
■ 죽음과 영원 사이
죽음의 기억은
적의 크기만 한 기억
하얀 접시에 나누어 담고
신이 가르쳐 준 대로 애통할 시간이 없다
―「적의 크기만 한 기억」에서
시인의 고백이 더욱 내밀할 수 있는 것은 그 고백이 죽음을 바탕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긴 시간을 함께해 온 사람의 사망 신고서에 도장을 찍고(「구름 도장」), 샛노란 꽃잎이 까맣게 타 죽으려고 하거나(「크레바스」), 스물다섯 청년이 20층 옥상에서 추락한다.(「위약(僞藥)」) 죽음은 완전한 끝이고 가장 짙은 어둠이다. 끝없는 아래를 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문자의 시적 화자는 그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위를 본다. ‘하양’으로 상징되는 절대자와 신을 향해 겸허한 눈빛을 보낸다. 죽음을 겪은 화자가 영원을 향할 때, 죽음은 끝일 수 없고 영원은 닿을 수 없는 꿈이 된다. 이뤄질 수 없는 양극단의 사이에서 무한한 시가 피어난다.
■ 눈부신 슬픔의 무대
어렴풋이 채송화 몇 송이 펴 있고 어렴풋이 벌레들이 기어가고 어렴풋이 새들이 날파리처럼 날아다니고 어렴풋이 눈사람이 녹고 사람들은 어렴풋이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어렴풋한 세계가 벼랑 저 아래 있었다
―「수업 시대」에서
상실과 참회에서 비롯된 신음과 울음이 시집을 가득 적시고 있지만 시인은 좀처럼 과잉되는 법이 없다. 누구나 저마다 고백이 되기 직전의 무엇을 가지고 있을 터. 수많은 고백들이 모두 바깥으로 터져 나온다면 역설적으로 고백은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고백이 극적일 수 있는 것은 삶이 무심하게 흘러가기 때문일 테다. 시인은 삶이 각자의 절실한 마음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일정하게 흐르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삶의 작동 방식을 논리적 언어로 설명하는 대신, 흘러가는 장면의 연쇄로 표현한다. 시에 담긴 건조하면서도 감각적인 장면의 연쇄는 고백이 극적으로 피어오를 수 있는 무대가 된다.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의 독자들은 가장 효과적인 무대에서, 가장 강력하게 터져 나오는 슬픔의 고백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해설을 쓴 조재룡 평론가의 말처럼, 이 눈부신 슬픔은 우리가 아름다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능성을 한껏 쏘아 올린다.
■ 본문에서
누구의 잎으로 산다는 건
한 번도 꽃피지 않는 것
어금니를 다물다 겨울이 오고
마치 생각이 없다는 듯
모든 입술이 허공에서 죽음과 섞이는 것
―「잎」에서
집에 돌아왔을 때
남자는 죽어 있었다
삶과 죽음 어느 것이 더 무서운가
죽음은
죽자마자 눈을 더 크게 떠야 할 삶이 기다리고 있다
남자는 뭉텅뭉텅 사라지는 중이었고
나는 왼쪽 폐 반을 자르고
진통제 버튼을 계속 누르다가
살아나는 게 무서워 함부로 하나님을 불러냈다
―「2014년」에서
미지근한 것들은 불길해 공원을 걷다가도 미지근하게 피는 꽃의 최후를 본다 어려서부터 미지근한 것들의 최후를 읽었다 이곳에서 미지근한 빵을 먹으며 지낸다 미지근한 욕조의 물처럼 미지근한 기도처럼 그날 데모 군중 끝에서 미지근한 얼굴로 따라가던 어떤 시인처럼 가장 늦게 남아 있는 나의 온도, 무슨 정말인 것처럼 날마다 멀리서 나에게 오고 있다 이렇게 생각이 다른 빵을 먹고 멸망할 수도 있어
―「다른 빵」에서
■ 추천의 말
낮에 머금은 것들이, 신음이 되어, 울음이 되어, 나에게서 빠져나오는 시간이 시집을 가득 적신다. 슬픔과 참혹함의 교차로에서, 시인은 죽음이 헐렁하게 빠져나가게 내버려 두는 대신, 삶의 가치를 되돌아보고, 성스러움의 순간들을 체현하는 밑거름으로 삼는다. 이 시집은 불가능함과 비극을 주관성 가득한 죽음의 언어로 실현하고, 꾹꾹 견디면서, 슬픔의 눈부심을 쏟아내고, 우리가 아름다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능성을 한껏 쏘아 올린다.
―조재룡(문학평론가) / 작품 해설에서
1부 고백의 성분
고백의 환(幻)
위약(僞藥)
낡은 사물들
2014년
잎
핀의 도시
밤의 경험
고백성
종소리
비누들의 페이지
위험한 하나님
집
사이
2부 우리가 버린 말들
오렌지에게
우기
흐림
난해한 고독
맨드라미 책
물의 기분
초식성
부화
old한 연애
개꿈
수업 시대
어떤 수족
오늘
팔
목화밭
꽃구경
깊은 강
튜닝
진화
연 날리기
가난한 애인
다른 빵
3부 나무다리
크레바스
부활절
고부스탄
빠름 빠름 빠름
밤에는
재
폐광
그림자
나무다리
시인들
네모의 이해
백목련
해바라기
4부 너무 하얀 것들
하얀 것들의 식사
구름 도장
분실된 시
야생
죄책감
흰 줄
빵과 꽃
편지
총의 무덤
민들레
지상은
적의 크기만 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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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해설┃조재룡
죽음, 시간성, 꽃피는 고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