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책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누군가에게 이야기 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위안을 받는다. 그것은 듣는 사람이 기막힌 해결책을 내놓느냐와는 전혀 무관한 나만의 감정소비이다. 특히, 이러한 감정의 발산은 결국 상대가 내 말에 얼마나 공감하느냐에 따라 만족의 정도가 달라진다. 내 눈을 보고 내 말에 온 신경을 기울여주는 이에게 말할 때라면 우리는 말할수 없는 평온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 것 또한 이와 비슷해서 누군가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내가 생각지도 못한 적확(的確)한 단어로 표현해 줄때 공감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될 것이다. 이를 감정수업이라 이름붙인 이유는 ’그럴 것’이라고 모호하게 생각했던 감정을, ’그런 것’이라고 규정지어 주기 위해서이다.

 

당신은 자기 감정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가?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이 책은 주인으로 살지 못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수업이다. 주인이 무엇인지, 나는 여태까지 주인으로 살아왔다고 쉽게 생각하고 있다면 일단 읽어볼 일이다.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남의 시선이 아니라 나의 관점으로 살겠다는 뜻이다. 이는 단순한 말 같으면서도 행동으로 옮기기 쉽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 많은 철학자 중에 왜 스피노자 일까. 스피노자는 신을 부정했다는 이유로 네덜란드 유대인 공동체에서 파문을 당한다. 사실은 파문을 유도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파문 후 서양의 자유 정신의 대표적 중심지 암스테르담으로 간다. 그는 공동체를 빠져나오 듯이 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역시 빠져나와 인간의 자유 영혼 속으로 들어갔다. 신을 부정하고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철학자가 감정을 대할 때는 어떤 마음일까.

 

철학자들 중 거의 유일하게 스피노자만은 ‘이성의 윤리학’이 아니라 개개인의 감정에 주목한 ‘감정의 윤리학’을 옹호했다. (p.20)

 

앙리 베르그송은 ‘모든 철학자는 두 가지 철학을 갖는다. 자신의 철학과 스피노자의 철학이다’라고 말한다. 그만큼 스피노자의 철학이 독보적이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단 한가지로 말해진다. 오직 ‘지금의 감정’ 집중할 것.

 

고전은 철학의 해설서

 

이 책은 스피노자가 정의 내린 감정 48가지를 다루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가 말한 감정을 가장 잘 드러낸 ‘고전’을 실었으니 그 작품 수 또한 48개이다. 고전은 왜 아직까지 살아 남아서 우리에게 되읽히는가. 그것은 스피노자의 철학이 살아 남은 이유와 같은데, 고전은 바로 인간이 갈망하되 얻을 수 없고, 욕구하지만 좌절한 감정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좌절한 경험은 우리에게 곤란한 경험이다. 그것은 대부분 나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적 명성, 환경적 영향, 주변의 평판 때문에 좌절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를 인식하기 시작하는데 이 부분이 책의 출발점이자 큰 맥락이 된다. 이와 함께 나에게 기쁨을 주는 타자와의 관계 또한 스스로의 감정을 읽어 나가는데 좋은 단서가 된다.

 

첫 걸음, 노예에서 벗어나기

 

첫번 째 소설을 무엇을 골랐을 지가 책을 펼치기 전에 개인적으로도 무척 궁금한 부분이었다. 내가 책을 펴낸다고 해도 첫 인상에 어떤 임팩트를 줄 것인지가 내 의도일 것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소설은 이반 투르게네프의 ‘무무’이다. 이 소설은 노예 게라심의 이야기다. 노예이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속여야 했고, 그가 정작 타티야나에게 사랑을 느꼈을 때 그의 주인은 노예의 사랑 대상을 먼 곳으로 보내버린다. 그리고 그는 ‘무무’라는 강아지를 키운다.

 

나이든 여 지주는 노예가 사랑에 빠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는 순간, 노예는 그 사람을 지키기 위해 주인의 명령을 거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노예나 다름없었던 농노는 자신의 감정을 부정해야만 한다. 만일 부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부정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p.30)

 

이 첫번째 소설의 이야기를 공감하고 읽은 독자라면 나머지 47개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더 절실히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철학의 단점은 그것을 배우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식자우환’이라는 고사성어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인용된 고전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를 알게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의 모습이 얼마나 남루한지 되돌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이 ‘존재로서의 나’를 위한 것이었는지, ‘보여지는 나’를 위한 것이었는지 극명하게 구분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