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는 불교철학, 동양철학을 얼마나 읽었으면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작가와 제목만 보고 오리엔탈리즘을 떠올린 내가 부끄러워지는 수준이었다.
이 책은 크고 작은 깨달음의 순간들로 채워져있다. 주인공 싯다르타부터 고빈다, 카말라, 카와스와미, 그리고 싯다르타의 아들까지 모두가 각자의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을 통해 인생에서의 중요한 선택을 하게 되는 이야기다. 지혜를 얻는다는 게 꼭 선으로 향하고, 덕을 쌓고, 자신을 정화하고 더 높은 것으로 승화하고… 이런 것만은 아니겠구나 생각했다. 싯다르타가 고타마에게 지혜를 ‘배울 수 없다’라고 느낀 것도, 결국 몸으로 정신으로 직접 체험하지 않는 배움이란 진정한 배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어렸을 때 입에 달고 살던 ‘학이시습시 불역열호’와는 어떻게 다른걸까?
(만원 지하철을 오가며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으로 굉장히 풍족해지는 독서 경험이었다. 싯다르타가 자아로부터 해방되고, 감각의 쾌락과 환희에 물들고, 타락하고, 참회하고, 다시 자아와 화해해 ‘단일성’의 신비에 이르는 그 과정이 너무나도 유려하게 표현이 되어 있었다. 무조건 ‘사고’에 머물러 있지도, 그렇다고 ‘경험’에만 의존하지도 않고… 모든 깨달음의 과정이 강물 흐르듯 쓰여져 있다.
강물의 가르침을 알려준 뱃사공 바르데바가 싯다르타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던 것도 우연은 아니다. 모든 것의 일체, 모든 것의 순환이라는 거대한 사상이 강물의 흐름 안에 있으니, 그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었던 바르데바야말로 선지자였던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바르데바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든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 강물의 소리를 듣고, 가르침을 주고 떠날 수 있는 사람. 신적 존재 그 자체 아닐까. 마지막에 고빈다가 오랜 벗인 싯다르타의 미소 위로 만물의 흐름이 겹쳐보이는 ‘몽타주’를 경험하는 부분은 소름이 끼쳤다. 그러면서도 고빈다가 안타까웠다. 수십년 간의 수행 끝에 결국은 ‘탈선’했던 벗이 자신은 얻지 못한 깨달음을 얻고 초월자가 된 것 아닌가? 세상에는 싯다르타 한 명의 탄생 뒤에 수십 수백만의 고빈다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종교소설이라 진입장벽이 높을 줄 알았지만 재밌게 읽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정화를 위해서 한 번씩 재독하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