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런 지극히 개인적인 선호의 영역에 대한 질문을 받고 곱씹어본 적이 있던가?
내가 그것을 좋아했던가, 에 대해서 오래 생각하게 하는 그런 사람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를 구성하는 것에 대해 오래 복기하게 하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내게도 있을까?

’사랑 예찬론자‘처럼 사랑의 아름다운 면만 보던 내게
”이딴 게 사랑?“이라고 질문하게 만든 책.
장마다 ’이런 게 사랑인가‘ 하며 잔뜩 메모를 남긴 책.

사랑 때문에 이렇게나 불안에 빠지고, 바보가 되다니.
내가 가진 것이, 혹은 갖지 못한 것이 이렇게나 부끄럽고 급기야 자기 자신이 약점이 되다니.
그렇게나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사랑에 갈등하면서도 결국은 다시 스스로 고통에 들어가다니.

결핍에서 가까스로 도망쳤으면서 다시 그 늪으로 몸을 던지는 그 권태롭고 관성적인 사랑이란 대체 뭘까.
그렇다고 한 순간에 불타오르듯 모든 것을 소진할 수 있는 열정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분명 그들이 서로의 고독과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발견하며 ”고독 형을 선고(p. 44)“하던 순간이 있었는데.
마지막 계단 한 칸에서 감당하기 어렵게 팽팽히 긴장감을 당기던 때도 있었는데. 분명 그에게 빨리 돌아오라 편지하며 한 사람에게 밤의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자신에게 달려오게 하던 때도 있었는데. 읽을 때는 분명 그 모든 순간들이 정말 사랑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한 순간 나 또한 그가 참 권태롭고 아이 같기만 했다.

마음과 감정이 널을 뛰네. 폴도 그랬겠지.

어째서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의 곁에서 한껏 데였으면서
다시 화상 입기를 자처하는 지,
어째서 나를 사랑하는 이로부터는 사랑을 마음껏 받는 것도 돌려주는 것도 못 하는지에 대해 책장을 덮고 오래 생각했다.

폴은 자신이 사랑하는 로제가 채워주지 못하는 밤의 외로움을
시몽이 아무리 넘치도록 채워준다고 해도…
결국 원하는 건 시몽과 함께하는 밤이 아닌, 로제와 함께하는 밤이었나보다.
결핍되어 마음이 사막처럼 갈라졌다 해도 ’무엇으로‘ 마음의 해갈을 주는 지가 아니라, ’누가‘ 결핍을 메우는 지가 중요한가보다.
심지어 로제가 폴의 외로움을 평생 채워주지 못할지라도, 그녀는 로제를 사랑하겠지.

그가 자신을 ”잠들고 깨는 데 그녀의 온기를 필요로(p. 17)“하지 않아 상처받았으면서, 막상 잠들고 깨는 일 뿐만 아니라 평생에 그녀를 필요로 했던 청년은 사랑하지 못하는 여자. 어쩌면 당연해. 그런 식으로 작동되는 사랑이 아니니까.
대체 사랑이라는 메커니즘은 어떻게 생겨먹었기에, 그토록 마음에 주인을 따져가며 반응하는지 웃길 노릇이다.

사랑을 노력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해.
사랑을 ’하면서‘는 노력해야 하지만
사랑을 ’시작하는 것‘은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닌가 보다.
”잘해 보려고 했어. 정말 잘 해보려고…“ (p. 148) 라고 내뱉었던 그녀의 말로 그것이 증명됐다. 잘해 보려고 노력하는 건 사랑이 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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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분명 소설인데, 작가는 어째서 인물들에 개입해서 소설틱한 변화와 소설틱한 사랑의 마무리를 내지 않고 인물들을 그대로 내버려 둬서 이런 결말을 냈을까.
그렇지만 그게 사강의 매력일 지도 모르겠다.

글로 배우는 연애가 소용 없다고 누가 그래?
사강이 말아주는 연애는 아주 지극히 현실에 발 붙이고 있어서 교과서로 써도 될 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