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그르니에는 카뮈를 정말로 아끼고 사랑했던 것 같다. 카뮈의 어려웠던 성장과정, 지병, 좌절, 고뇌, 열정 등 그의 인간적인 면이 잘 드러나 이 책을 덮으면서 카뮈를 더 좋아하게 됐다. 그는 실천적인 예술가였고 인간을 사랑했다. 그런 그가 존경한 장 그르니에는 정말 훌륭한 스승이었을 것이다.


P.019

그가 나로부터 ‘배운 것’? 그를 가르칠 책임이 있지만 그에게 저도 모르게 자신의 꿈들을 전달하기만 한 유별나지 않은 사람이 그의 곁에 있었을 뿐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강박 관념들을 정리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 경우였고 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고 해도 그것을 결코 내가 확고하게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 속에 갇혀 있는 자는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다른 이들을 인도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몇몇 정신적 재능의 부화에 깊은 감명을 받고 도움을 줄 수는 있다.

내게 맡겨진 젊은이들에게 나를 붙들어 매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그들에게 가르칠 책임이 있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내가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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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1

알베르 카뮈는 인간의 비참한 모습에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인간이 그토록 많은 불행을 충분히 감당하고 있으므로 주제넘게 불행을 장황하게 늘어놓음으로써 인간에게 고통을 추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람들이 느끼는 불행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행을 정면으로 바라보았고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불행을 역설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소용도 없고 유해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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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7

고독을 채우는 수단이 있다. 그것은 연극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희곡의 창작과 연출, 연기, 무대 장식이다. 알베르 카뮈에게 연극은 무한히 확장된 삶이었다. 연극이 보여 주는 그 수없이 다양한 거울 속에서는 삶에 대한 사랑이 충족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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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8

나는 알베르 카뮈의 목소리가 왜 ‘폐부’를 찌르는지 잘 알고 있다. 그는 숨김도 암시도 없다. ‘방백’으로도 ‘어중간한 목소리로’도 말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다. 그는 말해야 할 것을 직접적으로 말한다. 술책이 없다. 몇 사람밖에 좋아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한 작가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는 첫 문장에서 꺼낸 말을 두번째 문장에서 철회한다.”

다음으로 그는 자기자신의 전부를 걸고 말한다. 말을 하는 것은 그의 일부분이 아니다. 그는 타인에게 나는 이것이고 당신은 저것이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인간 대 인간으로 그들에게 말한다. 그들의 가장 깊은 욕구, 그들의 가장 완전한 욕망을 표현한다.

따라서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말미암아 그는 모든 이가 경청하는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더군다나 자기 자신의 초상을 그리려 하기보다 자기 자신의 진실이 아닌, 고전주의 작가들처럼 모든 이에게 타당한 진실을 표현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그만큼 더 광범위하게 읽히게 된 것이다. 아마 이 이중의 성격. 이를테면 절대를 지향하는 표현과 이해 방식에 힘입어, 그는 본의 아니게 예언자로 여겨졌을 것이며 그의 책은 성경의 구절처럼 읽히게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