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하게 삶을 즐길 줄 아는 자는 얼마나 멋있는가.

송지현
출간일 2020년 8월 28일

동해 여행에 가져간 책이다. 소설가가 쓴 동해 생활의 에세이라니, 그야말로 가볍게 읽기 좋은 글이 아니겠는가! 여행에 책을 처음 들고 가보는데 너무 어렵거나 두꺼운 책은 손이 안 갈 것 같았기에 좀 가볍게 읽을 만한 책을 찾고 있을 떄 이 책이 내 눈에 띈 것이다.

글씨 폰트가 그동안 읽었던 책들에 비해서 큼직했고, 중간 중간 아마 작가님의 동생 분이 찍은 것 같은 사진들도 많이 있어서 꽤나 빨리 읽을 수 있었다. 거의 300쪽에 육박하는 책인데 2시간 반 만에 다 읽은 것 같다. 1박 2일 여행일정이라 한 권만 들고 갔는데, 첫 날 모두 읽어버리는 참사(?)가 벌어졌을 정도. 바다 냄새 물씬나는 책을 바다를 바라보면서 읽는 맛이 참 좋았다. 특히 객실에 바다를 바라보는 욕조가 있어서 따뜻한 물에서 반신욕하면서 뒹굴거리면서 책을 읽는 그 시간이 꽤나 행복하고 힐링이 됐다.

이 책은 젊음 그 자체를 담고 있다.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삶의 양상이긴 했지만, 이렇게 느긋하게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 하는 사람 특유의 날카로운 성찰이라던지 유려한 문장들도 군데군데 있었지만, 주로는 거의 일기에 가까운 글이었고, 때로는 깔깔 웃고 때로는 감동도 받으면서 편하게 읽었다.

“우리 예전에 같이 살았을 때 기억나? 그때 학교 담벼락에 기대서 밤새 귀신 얘기하고 그랬잖아. 우리는 앞으로 살면서 그 담벼락을 다시 찾아야 할 것 같아.” – pg. 25

작가의 동해 생활은 동료 권민경 시인의 말 한마디에서 시작된다. 어린 시절 기대서 한참 떠들던 담벼락 같은, 편하게 기댈 수 있는 장소를 찾아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미셸 푸코가 말한 헤테로토피아에 해당하는 장소가 필요하다는 말을 참 간결하고도 멋진 표현으로 얘기해준 것 같다. 같은 문인이라 하더라도 시인들은 더 짧은 말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때문인지, 유독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날카로운 것 같고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묵직한 것 같다. 잡동산이에 있었던 발췌본을 읽을 때도 느꼈었던 건데, 이 책에서도 권민경 시인이 여러 번 ‘나의 현자’라고 표현되는 걸 보면 어느 정도 주변인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작가가 찾은 담벼락은 동해였다. 그리고 책 말미에 있는 추천사들을 읽어보면 작가의 여러 주변인들에게 있어서도 동해는 담벼락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만큼 이 책은 여러 예술인들의 젊은 시절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들의 청춘 시절을 기록한 일기인 셈이다. 지금은 꽤나 자리를 잡고 유명한 여러 예술인들이 그렇게 자리를 잡기 전 방황하던 젊은 시절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마냥 가볍지는 않았지만, 그 와중에도 작가와 주변인들의 유쾌한 삶의 태도가 느껴져서 여행길에 들고 가기 참 적절하다고 느꼈다.

“종종 잊고 살곤 한다. 앞으로도 내 인생에 수많은 ‘첫’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내가 누군가의 ‘첫’이 될 수 있음도.” – pg. 108

지금도 그렇게 나이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도 지금보다 더 어린 시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마냥 웃기지만 대학을 처음 졸업하는 시기가 가까워올 즈음, 나는 조금씩 나이를 들어간다고 느끼면서 앞으로의 인생에서 새로운 것이나 설렘 같은 것은 점점 없어지겠지 생각하면서 씁쓸해하곤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나는 인생 전반에 걸쳐 생각해왔던 진로를 바꿨고, 그 안에서 정했던 꿈 역시 생각지도 못한 시기에 나의 짝을 만나고 결혼하면서 바꾸게 되는 등 그때의 나는 상상도 못했던 끊임없이 새로운 설렘을 경험해왔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감에 있어서도 계속해서 새로운 꿈을 꾸고 다양한 사람을 만날 것이고, 나의 자녀를 맞이할 것이며 이후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게 될 것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고, 얼마나 나이를 먹든 늘 처음 해보는 것들이 생길 것이다.

“나는 이렇게 바다 한가운데에서 혼자 힘으로는 통제할 수조차 없는 보드를 붙들고 있는 지금처럼 외롭게 인생을 살아가겠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도 없겠지. … 그 순간 파도를 탔다는 직감이 들었고 나는 일어나려고 시도했지만 그대로 엎드려서 쭉 해변까지 떠밀려 갔다. … 갑자기 참을 수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으면서 나는 바다에 떠 있는 서퍼들을 보았다. 모든 게 파도를 잡는 이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속도가 붙는 이 한순간을 위한 것이구나. 그 뒤로는 별로 외롭지 않았다. 잘 타는 사람들도 다들 이 한순간을 기다리며 앉아 있다고 생각하니 그냥 마음이 놓였다.” – pg. 176-177

물론 살다보면 앞서 말한 긍정적인 생각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삶이 나를 힘들게 할 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닥치더라도 무너지지 않고 삶을 똑바로 바라보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가진 것이 많든 적든, 기회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오고 그 순간을 잡는 것은 오로지 나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훨씬 서핑을 잘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안되겠다 하면서 포기했다면 파도가 다가왔을 때 파도를 즐기지 못했을 것이다. 계속 남들과 비교하면서 절망하고 주저앉기보다는 나의 길을 생각하면서 삶을 관망하다보면 기회가 왔을 때 분명히 저렇게 환하게 웃을 날이 다가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날의 꿈은 색까지 기억날 정도인데, 그 꿈을 꾼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것이. 그날의 기억은 언제든 우리를 웃게 하는데, 우리 외에는 그 누구도 함께 웃을 수 없다는 것이. 그래도 그런 근사한 기억을 우리가 나눠 가져서 언제고 웃을 수 있다는 것이.” -pg. 225

담벼락 같은 장소도 장소지만, 그곳에서의 추억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의 존재도 참 중요한 것 같다. 아무리 많은 추억이 있더라도 그 추억을 같이 공유할 사람이 없다면 꽤나 쓸쓸하지 않을까. 조금 더 여유롭게 삶을 바라보면서, 내 주변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과 계속해서 함께 추억을 공유할 수 있도록, 조금 더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불가해한 순간들, 의미 없는 만남. 삶이 고작 그런 것들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왕 태어난 김에, 즉흥적으로 타투도 해 버렸고, 어쩌다 동해까지 내려가서 이렇게들 만나 웃고 있지 않나, 를 생각하면 삶이 고작 그런 거라서 다행이다.” – pg. 215

책을 읽으면서 앞으로 삶을 살아감에 있어 조금 더 가벼운 마음을 먹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 일을 쉬게 되기까지 나는 항상 성실하고 최선을 다하면서 바쁘게 달려왔다. 원해서 쉬게 된 건 아니지만 그 덕분에 그 동안 모르고 살았던 여유를 알게 됐다. 생각보다 삶에는 다양한 부분이 존재했고, 느긋하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면서 사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내 삶이 ‘고작 그런 것’이 되기 싫어서 열심히 살았지만, 사실 ‘고작 그런 것’이어도 삶은 즐거운 구석이 있고 조금 더 즐겨도 되는 것이다. 이번 휴직으로 삶의 가치관과 방향성이 많이 바뀌었음을 느낀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생각에 걸맞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콘크리트를 만들 때 바닷모래를 쓰기도 한다던데. 우리는 항상 바다와 함께 살고 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닌가?” – pg. 109-110

그러니까 삶은 좀 여유롭게. 가끔 너무 고달프게 느껴진다면 내 주변의 바다를 느껴보려고 하면서 조금은 천천히 내 속도대로, 내가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즐기면서 나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