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희 / 가만한 나날

김세희의 첫 소설집. ‘처음’에 관한 8편의 단편소설을 묶은 것이고 표제작인 ‘가만한 나날’이 제일 좋았다. 나의 첫 이별, 첫 취업, 첫 출근, 첫 퇴사 등 온갖 찌질하고 어설펐던(지금이라고 안 찌질한거 아님), 잊고싶은 처음들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었고, 소설 자체는 좋았다. 예 그리고…… 지인 아웃팅 이슈가 있는 작가의 소설을 피드에 전시하는 것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는데, 포털에 이 작가분 관련 기사가 제법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므로 검색해보시고 패스 여부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슈 전에 구매했던 책이라 일단 읽었슴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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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95, ‘그는 자신에 대해 아무렇게나 막 쓰라고 말하는, 소설가의 남편으로서도 귀한 덕목을 갖고 있다.”며 남편에게 감사를 표하는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는 피가 차갑게 식기도. 아아 그래서… 작가와 작품은 떼려야 뗄수가…이 글 삭제할까 하다가… 아니 그래도 읽었으니 올려야…


P.034 ?그건 정말로 슬픈 일일 거야

“오빠는 죽염 마니아예요.”

아내가 말했다.

“죽염에 우주의 기운이 스며 있다고요. 모든 음식에 죽염을 뿌려서 먹어요.”

“모든 음식까지는 아니야.”

그가 쑥스러워했다.

진아와 연승은 사양했다.

“오빠 만나면서 저도 죽염을 먹게 됐어요.”

아내가 수저로 떡국을 저으며 말했다.

“좋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연승이 말했다. 그건 대화를 이어가는 그의 화법이었지만, 진아는 넌 어디서 그렇게도 좋다는 얘기를 많이 주워듣냐고 빈정거리고 싶었다.

P.080 ?현기증

현기증이 일어나는 순간이 있다. 현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순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채 인식하지 못했던 광경이 갑자기 빛을 비춘 듯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낼 때,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고 싳지만, 그조차 허락되지 않을 때,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상률과 하려는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들은 살림을 꾸리고 있었다. 이건 결혼과 다를 바가 없었다. 집을 구하고 그 집을 채울 가전제품을 사러 다니고 있었다. 그게 결혼의 뜻이었다. 이번 이사는 이전 생활의 연장이 아니었다. 그저 방 하나 더 많은 집으로 이사를 가는 게 아니었다.

P.261 ?말과 키스

나는 현진의 삶에 관해, 그녀가 직접 들려준 부분 말고는 거의 몰랐다. 주말은 누구와 보내는지, 친한 친구가 있는지. 그해 봄과 여름, 가을을 지나는 동안 그녀와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매번 다른 장소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낯선 동네의 낯선 공간을 물색했다. 친숙한 물건이 없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낯선 곳. 눌린 베개가 지난밤의 잠을, 가운데가 움푹 팬 왁스 양초가 그것을 선물한 사람과 보낸 시간을 불러내 훼방 놓지 않는 곳으로. 눈에 익은 사물들이 익숙하게 배열된 공간에서는 이야기도 이미 패어 있는 홈, 늘 가던 경로로 흘러가려 했다. 우리가 나눈 말들 중 친교를 위한 말은 거의 없었다. 그녀와 나의 몸이 닿는 일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불필요한 말과 몸짓이 어찌나 많은지! 어떤 때는 주요 참고인으로서 캠코더 앞에 앉아 진술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야기가 시작되고 거기 집중하면 자세는 점차 느슨하게 허물어졌지만, 의식은 아주 추운 날, 텅 빈 밤거리를 혼자 걸을 때처럼 팽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