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크 입센 인형의 집

지금 읽어도 여전히 큰 울림과 깨달음을 주는 이 희곡은 1879년 12월 코펜하겐에서 초연되었으며 한국에선 1925년 조선배우학교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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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낭비꾼, 귀여운 종달새가 각성하여 인형의 집을 떠나는 3막에서는,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아직도 유교적 가부장제가 여성을 몹시도 억압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짐에 더해 경제까지 함께 책임지고 있는 21세기의 한국여성들에게 필독서로 읽혀져야 한다고 생각. 역시 페미니즘 문학의 고전이라고 일컬어질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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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14

헬메르: 나의 사랑스러운 작은 노라, 아니라고는 못하겠지. (팔로 그녀를 안는다.) 낭비꾼 새는 귀엽지. 하지만 돈이 아주 많이 들어. 이런 새를 키우는 게 남자에게 얼마나 돈이 드는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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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18

노라: (부드럽게) 가엾은 크리스티네, 너는 남편을 잃었잖아

린데 부인: 그래, 삼 년 전이지.

노라: 그래, 나도 알고 있었어. 신문에서 읽었으니까. 아, 크리스티네, 그동안 너에게 편지할 생각은 여러번 했어. 하지만 매번 다른 일이 생겼고 매번 미루었지.

린데 부인: 노라, 그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노라: 아니야, 크리스티네. 내가 나빴어. 아, 불쌍한 크리스티네,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남편이 유산을 남기지도 않았지?

린데 부인: 안 남겼지.

노라: 그럼, 아이는 없어?

린데 부인: 없어.

노라: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네?

린데 부인: 걱정도 없고, 괴로워할 그리움조차 없어.

노라: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바라본다.) 하지만 크리스티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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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34

노라: 아, 이제 정말 아주아주 행복해요. 이제 세상에 간절한 소원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랑크: 그래요? 그게 뭔데요?

노라: 토르발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하나 있어요.

랑크: 그럼 왜 말을 안 하죠?

노라: 용기가 안 나요. 나쁜 얘기니까요.

린데 부인: 나쁜 얘기라고?

랑크: 아, 그럼 이야기하지 않는 게 좋지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할 수 있잖아요? 토르발에게 그렇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뭔가요?

노라: 죽어 버리라고 너무너무 말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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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2

헬메르: 당신은 아내의 도리 그대로 나를 사랑했어. 통찰력이 부족해서 수단에 대해 옳은 판단을 내리지 못했을 뿐이지. 하지만 당신이 스스로 제대로 행동하지 못한다고 내가 당신을 덜 사랑할 것 같아? 아니, 아니, 그렇지 않아. 나에게 기대면 내가 당신에게 충고를 해 주고 인도하겠어. 여자인 당신의 무력함이 당신을 두 배로 매력적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나는 남편이 되어서는 안 될 거야. 당신은 내가 했던 심한 말에 얽매이면 안 돼. 그건 내 위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갑자기 놀라서 한 말이야. 노라, 나는 당신을 용서했소, 당신을 용서했다고 맹세하오.

……

헬메르: 아, 노라, 당신은 남자의 마음을 몰라. 자기 아내를 용서했다는 걸 마음속에 품고 있는 건 남자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하고 만족스러운 일이지. 자기 아내를 전심으로, 거짓 없이 용서했다는 것 말이야. 그럼으로써 여자는 두 배로 그의 소유물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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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5

노라: 그게 바로 문제의 핵심이에요. 당신은 나를 이해한 적이 없어요. 토르발, 나는 부당한 일을 많이 당했어요.먼저는 아버지에게서, 그다음엔 당신에게서.

노라: (머리를 흔든다.) 당신들은 나를 사랑한 적이 없어요. 당신들은 나에 대해 애정을 갖는 게 즐겁다고 생각했을 뿐이죠.

헬메르: 노라, 말도 안 돼. 당신은 감사할 줄도 모르는군. 당신은 이곳에서 행복하지 않았나?

노라: 아니요. 행복한 적은 없었어요. 행복한 줄 알았죠. 하지만 한 번도 행복한 적은 없었어요.

헬메르: 아니라고! 행복하지 않았다고!

노라: 그래요. 재미있었을 뿐이죠. 그리고 당신은 언제나 내게 친절했어요. 하지만 우리 집은 그저 놀이방에 지나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의 인형 아내였어요. 친정에서 아버지의 인형 아기였던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그리고 아이들은 다시 내 인형들이었죠. 나는 당신이 나를 데리고 노는 게 즐겁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놀면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토르발, 그게 우리의 결혼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