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하게 살아왔던 카타리나 블룸이 언론의 악의적인 보도에 의해 끔찍한 삶을 살게 되는 내용이다. 먼저 카타리나의 살인사건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사건의 원인에 대한 설명이 이후에 나오기 때문에 처음에 읽으면서 다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주인공 카타리나 블룸은 기자 퇴트게스를 살해한 후 경사에게 찾아가 자백한다.

그렇게 시작한 이야기는 그녀가 왜 사람을 죽일 수 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한다. 볼테스하임 부인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간 카타리나는 루트비히 괴텐이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고, 부인의 집을 떠나 함께 자신의 아파트로 간다. 그 후 괴텐이 아파트를 나가는 것을 돕는데, 괴텐은 검찰과 경찰이 쫓던 인물이었고, 카타리나는 그에게 동조한 혐의를 받는다.

그 이후부터 카타리나는 의심의 대상을 넘어 무분별한 의혹 제기와 조롱의 대상이 된다. <차이퉁>지는 대대적으로 카타리나를 막스주의자, 헤픈 여성, 범죄자로 몰아가는데, 그런 보도가 시작되면서 카타리나의 집에는 경고 편지와 이상한 전화와 쪽지가 오고 협박 전화까지 받는다. 이후 루트비히 괴텐에 대한 신문 보도의 내용은 대부분 카타리나에 대한 것으로 이루어지며 지속적으로 무분별한 의혹 제기의 대상이 된다.

심지어 기자 퇴트게스는 암 수술 이후 쉬고 있는 카타리나 블룸 어머니의 병실에 페인트공으로 위장 후 들어가 카타리나에 대한 취재를 하고 또 부인의 말을 왜곡하여 기사를 썼다. 퇴트게스는 진술을 바꾼 이유로 “그는 기자로서 “단순한 사람들의 표현을 도우려는” 생각에서 그랬고, 자신은 그런데 익숙하다고 해명했다.” 이후 충격을 받은 그녀의 어머니는 숨을 거두고, 그 기사는 분명 블룸 부인의 죽음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추측한다. 어릴 적에도 울어본 적 없었던 카타리나는 부인의 시체 안치소를 떠나며 목 놓아 운다.

그렇게 고통받던 카타리나 블룸은 침착함을 되찾고 퇴트게스를 살해할 생각을 하게 된다. 이후 이야기의 서두에서 나타난, 카타리나가 권총으로 퇴트게스를 살해한 후 자백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카타리나 블룸은 언론의 폭력을 물리적 폭력으로 해결한다. (그런데, 해결이란 말이 옳은 것일까? 정말 해결된 것일까)

저자는 이 사건을 이렇게 말한다. “어느 젊은 여자가 즐거운 기분으로 쾌활하게 전혀 위험하지 않은 댄스파티에 갔었는데, 나흘 후에 그녀는 살인자가 된다. 사실 잘 들여다보면 그것은 신문 보도 때문이었다.” 결국 악의적인 보도가 파국적 결과로 몰고 간 것이다. “한 인간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부당하게 요구한 나머지 가차 없이 살인이라는 종말로 치닫게 되는 갈등이 있을 뿐이다.”

저자는 인물과 사건은 자유롭게 꾸며낸 것이라 말하지만, 많은 이들은 실제 있었던 <빌트>지를 대상으로 한 언론 비판에 대한 글이라 확신하고 있다. 해설에서 설명하지만, “이 작품의 모델은 1972년 1워 바더 마인호프 일원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언론의 비난을 받은 것은 물론, 해직까지 되었다가 나중에 무혐의로 복직되었으나 상당한 명예 실추를 경험했던 하노버 공대 심리학 교수 페터 브뤼크너로, 뵐은 이 모델을 지식인이 아닌 가정 관리사라는 평범한 보통 사람 카타리나 블룸의 체험으로 허구화 했다.” 더불어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의 부제는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이다. 물리적 폭력은 직관적으로 부정의함을 인지하지만 우리는 이 보이지 않는 폭력을 어떻게 인지할 것인가. 이런 배경들을 고려한다면 저자 하인리히 뵐이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더더욱 우리는 실감하게 된다.

악의적인 보도란 무엇인가. 객관적 사실 추구와 거대 담론을 위한 취재라는 기자의 숙명을 벗어나 스스로의 욕망을 한 서사로 발현시켜 그 서사에 끼워 맞추게 된다면, 그것은 기자가 아니라 그저 추리물 소설가가 아니면 무엇인가. 기자의 본분이란 무엇인가. 또 그것에 쉽게 휘둘리는 비이성은 무엇인가.

나는 한 개인의 인격을 말살하며 엄청난 언론의 조리돌림 후에 그렇게 다뤄졌던 사건, 의혹들이 무죄로 발표되는 것을 봐왔다. 기자들은 사실 보도를 떠나 그것에 서사를 붙이고 기사 제목으로 왜곡하며 전문가의 발언조차 자신의 서사대로 ‘이용’한다. 그 대상에 실질적인 한 두가지의 불법이나 도덕적 잘못이 있으면 그들에겐 더욱 좋은 먹잇감이 된다. 최근엔 언론사조차 팩트체크를 제대로 하지 않아 기사가 삭제되거나 수정되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들이 많아졌다.

한국의 민주화 시절 강하게 외치던 것은 언론의 독립이었다. 그저 사실을 말할 수 있고, 누구나 자신의 발언을 할 수 있는 그 귀중한 가치를 부르짖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 유산을 넘겨받은 시대의 저널에는 무엇이 남아있을까. 먼저 이 사회가 민주적인 사회라 믿는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언론의 독립과 정직함일 것이나, 그것을 넘어 민주주의에 신뢰를 주는 것은 언론의 질이다.

이런 비판은 수십 년 전에도 제기된 것이지만,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AI에 의해 기자도 결국 대체될 것이라는 말이 들려오지만, 결국 데스크는 사람이 쥐고 있다.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다. 그것의 생산자든 소비자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