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은 꽤 있었는데… 읽은거라곤… 헤밍웨이의 < 노인과 바다 >와 주제 사라마구의 < 도플갱어 >, < 눈먼자들의 도시 >뿐이다. 그나마 꼼수를 부려서 얇은 < 데미안 >을 읽기로 했는데… 음… 만만치 않은 이야기였다.
십자가 수난 이야기는 내 자신이 내 집처럼 편안히 확신해도 된다고 믿었었는데 지금 비로소, 얼마나 개성 없이, 얼마나 상상력과 환상 없이 내가 그것들을 듣고 읽었었는지 알았다.(p.82)
이 부분을 읽으면서 얼마나 뜨끔했는지.. 많은 책들을 읽으면서 나름의 사색을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이 말은 나에게 하는 말 같아서… 참으로 얼마나 개성없이 얼마나 상상력과 환상 없이 책들을 듣고 읽었었는지 반성을 해보게 된다. 전반적인 이 책을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 글을 읽고 내 스스로를 반성했다면 과히 이 책을 헛 읽지만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헤르만 헤세가 1919년 발표를 했는데, 당시에도 작가로 유명했던 그는 작품성만으로 평가받아 보고 싶어서 ‘에밀 싱클레어’라는 유령작가로 발표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눈밝은 독문학자가 문체 분석을 통하여 < 데미안 >이 헤르만 헤세의 작품임을 밝혀냈다고 한다. 어떻게 문체를 보고 알아차릴수 있을까. 그 사람은 학자이고, 나느평범한 독자라고 애써 위안을 삼아본다.
고전이라도 ‘작품해설’을 읽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작품해설을 읽어본 책이다. 그만큼 알듯 모를듯 해서 과연 내가 잘 쫓아가고 있는지 해서이다. 사실 남들의 해설을 듣는것보다 스스로가 무언가를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워낙 실력없는 독자이고, 하두 팔랑귀라서.. 그런데 이 작품은 어딘지 모르게 잘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자아의 삶을 추구하는 한 젊음의 통과의례 기록’이라는 이 책은, 사람들이 초반에는 혼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보다는 남들에 의해서 생각을 정립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때 고뇌하며 알에서 깨고 나오려는 그런 과정을 담은 것이 아닐까. 마치, 내가 아직도 시에 대해 어려움을 느끼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학생때 배운 감정에 대한 주입식 때문에, 진정으로 아직 시라면 어려움을 느낀다. 밑줄 쫙 치면서 이 시어의 의미를 깨알같이 적고 무작정 외웠던 탓에 아직도 시라는 것이 거리감이 드는데, 나만의 감정으로 읽게 된다면 그것이 나의 자아를 찾는 것의 일환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