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당최 무거운 것인가 가벼운 것인가. 우리의 매 선택이 평생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우리 생애의 매 순간은 아주아주 무거워 보인다. 그러나 결국 죽고 나면 끝인 삶, “한 번 뿐인 것은 없는 것과 같다”라는 말을 상기해본다면, 삶은 참을 수 없게 가볍지 않을까?
어느 부분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책은 한마디로 종잡을 수 없는 책이고 또 그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모든 획일성과 논박 불가능의 “키치”들에 대한 풍자. 일단은 이정도로 서툴은 정리를 해 두고 독후감을 써내려가본다.
소설은 크게 두 커플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제각각 스토리가 전개된다.(그런 의미에서 테레자가 토마시에게로 올 때 『안나 카레니나』를 지니고 있었던 점은 꽤 재밌는 것 같다.) 곧 토마시-테레자 커플, 그리고 사비나-프란츠 커플이다. 각 커플들은 서로 자신의 연인과 어떤 견해의 차이를 가짐에 끊임없이 갈등을 갖는데, 그 견해란 간단히 말해서 인생의 경중(輕重)에 관한 견해의 차이이다.
소설의 초장부터 작자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죽고 나서도 살아온 인생을 영원히 반복해서 살게 된다는 니체의 사상-을 들이밀더니 바로 다음 장엔 또 “한 번 뿐인 것은 없는 것과 같다”는 체코의 속담을 거론하며 독자를 혼란에 빠트린다.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아주 무거운 것이렷다? 그러나 한 번의 인생(혹은 한 종류의 인생. 사실 이부분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뿐이니까 사실은 가볍겠네?
혼란스러움을 일단 접어두고 꿋꿋이 작품을 읽다보면 1차원적이지만 사비나와 토마시는 인생을 가볍다고 보는 입장을 상징하고, 테레자와 프란츠는 인생을 무겁다고 보는 입장을 상징한다고 해석을 할 수 있을것이다.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관계는 별개라고 주장하는 외과의 토마시(가벼움), 불우한 가정에서 자라 안정되고 진지한 사랑을 구하는 테레자(무거움), ‘조국을 잃은 망명예술가’라는 타이틀을 혐오하는 예술가 사비나(가벼움), 모든 혁명을 선망하는 학자 프란츠(무거움). 그러나 만족스럽지는 않고 찝찝하다.
나는 계속해서 나름의 해석들을 내리지만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작품을 뜯어보며 더 완벽하고 정제된 언어로 작품을 정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을 틀안에 정리하려고 하면 할수록 혼란만 가중되었다. 가벼움이라고 정리한 토마시는 베토벤의 es muss sein!을 되네이며 운명과 사랑에 몸을 던지기도 하며 “무거운”행보를 보이고, 소련치하국가의 자유와 독립을 부르짖던 프란츠는 공산주의에 점렴당한 캄보디아를 위해 시위행렬에 끼게 되는데 오합지졸 지식인들의 광경을 아이러니를 느끼고 방콕 허름한 호텔에서 허무하게 강도살인을 당하며 “가벼움”으로써 생을 마치는지라…
작품에서는 계속해서 “키치”라는 의미불명의 단어가 거듭 강조된다. 키치란 “존재의 확고부동한 동의”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인생이 어떤 심오한 의미가 있을것이라는 믿음, 어떤 현상이 생겨난 데에는 필연적인 연유가 있을 것 이라는 믿음, 모든 인간에게 특유의 수식어를 부여하고 싶어하는 기벽(奇癖)을 의미하는 것 같다. 사비나는 자기에게 “조국을 빼앗긴 불쌍한 예술가”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포효한다.
나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키치예요!
결국 그녀는 공산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모든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 모든 무거운 논박불가의 획일성을 혐오했던 것이다.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흔들리는 순간, 우리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휩싸인다. 우리는 의아하게도 무의식적으로 존재에 대해 확고부동한 동의를 갖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신에 의해, 혹은 어떤 과학적 원리에 의해 아주 체계적이고 깔끔하게 설계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던 이 세상은 사실 수많은 모순으로 뒤덮여 있고, 항상 그러한 것이 결코 없고, 우리의 자아는 참을 수 없게 불안하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음을 느낀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인생의 가벼움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렷다? 전체 내용이 확고부동한 “키치”에 종속된 인생, 그러니까 무거운 인생을 부정하니 그렇다고 봐야겠지만, 이 작자는 참으로 경탄스럽기 그지없게 인생이 가볍냐 무겁냐 하고 묻는 그 질문에마저 무의미하다는 비소(鼻笑)를 날린다.
쿤데라의 작품엔 절대 작품해설이 붙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 조국 체코에서 사회주의라는 획일적인 거대담론의 위험을 체험해보았던 작가의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절대불변하는 의미는 결코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는 느낌이랄까. 내가 이 작품을 모든 논박불가능한 획일성과 “키치”에 대한 대풍자라 해석한 것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
읽으면서 나의 1차원적 해석의 찝찝함을 못참아 작품을 자꾸 뜯어보고 끼워맞춰보며 해석을 시도하는 나의 모습조차 작품속 인물들(토마시와 프란츠 둘에게 그런 면이 있었던 것 같다) 모습에 들어있는 것 같아 심술이 나기도 했다.
어려운 책이었다. 때문에 독후감이 내가 써놓고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게 됐다. 1회독만으로 이해 될 책은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1회독으로 호기롭게 독후감을 쓰는 나란… (절레절레)
중국의 고전 『도덕경』에선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도가 아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럼에도 도를 설명하기 위해 도를 “도”라고 명명하며 설명할 때의 노자의 난처했을 마음에 동감을 표하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독후감을 마친다. “키치”로 규정할 수 없는 인생무상의 감상을 표현하려 “키치”적으로 작품을 정리하려다보니… 참으로 난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