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산 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무진(雾津)의 뿌연 안개에 들어서는 순간은 너저분했던 속세를 잊는 일탈일 것이다. 그리고 무진의 안개를 나서 일상으로 복귀 할 때 또한 무진을 잊게 될 것이다.
「무진기행」의 주인공 윤희중은 항상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하거나 새 출발이 있을 때에만 고향인 무진을 찾아왔다. 그의 회고 속의 무진은 썩 유쾌한 경력의 공간이 아니다. 그엔 6•25 징집을 피하려 어머니에 의해 골방에 쳐넣어지고, 초라히 웅숭그리며 수음과 구질한 편지들로 생을 영위하던 젊은 날의 자신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때의 그는 순수했다. 33살의 희중은 속물적인 세상에 너무 잘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무진은 그의 순수의 시대이며, 과거의 그 자신이다.
무진에서 그는 수많은 자신을 발견한다. 박과 조, 인숙, 자살한 화류 여성의 시체에서까지… 일상과 이상, 순수와 탁류, 속세와 자폐. 이들은 이들 사이를 가르는 경계가 안개로 인해 흐려진 무진의 둘레와 같이 모호한 채로 희중에게, 무진에 들어있다.
「무진기행」은 여느 한국 근대 소설이 그렇듯 여성 인물을 단편적으로 대상화 시켜 등장시키는 점이 다소 있다. 작중 여성 인물인 인숙을 그저 속물적인 인간으로만 놓는게 아쉬웠다. 그녀에 대한 주체적인 묘사가 부족했다. 그래도 후반부 바닷가를 거닐다 “전 선생님께서 여기 계시는 일주일 동안만 멋있는 연애를 할 계획이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라고 말하며 희중을 붙잡고 서울로 가겠다는 본래의 기도(企圖)를 단념했다는 뜻을 내비치며 앞선 그녀의 속물적인 태도가 실은 출세주의에 물든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 일종의 위악이었음을 선언하는 장면은 좋았다.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끝에서 희중이 무진을 떠나며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 쓰인 표지판을 보고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라는 서술이 이어진다. 나는 여기서 조금 울적해졌다. 나도 종종 현실의 너저분함에 사무칠 때마다 「무진기행」을 펼쳐 사위가 안개로 뒤덮인 무진으로 도피하겠는데, 그 결말이 항상 황급히 무진을 떠나 탁한 일상의 궤도속으로,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돌아오게 될 것이 명백하기에, 조금 울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