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창구에서 일하는 수영은 돈을 맡기러 온 사람과 꾸러 온 사람을 구별할 수 있다. 옷차림, 가방과 구두, 눈빛, 걸음걸이를 훑어보며. 겉모습이 번듯한 고객은 역시 일정 연봉 이상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적금 상품을 문의한다.

은행을 배경으로 네 사람은 사내연애 중이다. 상수, 수영, 종현, 미경. 모두 사랑을 원하지만 사랑 ‘만’ 원하지는 않는다.

상수. 비정규직 텔러 수영을 사랑하지만 그의 가난한 배경이 걸린다. 어마어마한 부잣집 미경과 연애하면서, 손에 닿을 듯 말 듯한 중상류층의 생활을 경험하지만 어딘지 공허하고 헛헛한 마음이 든다. 미경과 헤어지면 허기가 들어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 먹어야 한다.  200만 원이 넘는 백화점 브랜드 패딩을 턱턱 사 줄 수 있는 미경에게 움츠러들고 비슷한 금액의 선물을 해줘야 한다는 압박이 부담스럽다.   그러나 사업이 기울고 있는 선배가 자기 좋아하던 부잣집 여자 대신 사랑하던 아내를 선택한 것을, 지금은 후회한다는 말이 계속 걸린다. 그렇다고 미경에게 못난 마음 그대로 보여줄 용기도 없다. 상수는 열등감과 신분상승의 신기루 사이에서 여전히 수영을 사랑하며 방황한다. 작가는 한국 문학에서 잘 그려지지 않았던 한국 남성 특유의 찌질함, 비겁함.. 그런 것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수영. 일 잘하고 싹싹하지만 직업은 비정규직 은행 텔러. 은행 남자들은 수영의 얼굴만 보고 앞에선 간 보고, 수작 부리면서 없는 자리에선 저  얼굴이면 남자들을 얼마나 후리고 다녔겠느니, 누구한테 다리를 벌렸느니 하는 말을 서슴치 않는다. 시계와 가방이 아니라 없는 자리에서도 함부로 얼굴과 몸 품평을 당하지 않는 위세가 갖고 싶다. 청경 알바로 일하는 두 살 어린 고시생 종현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수영도 사랑만 원하진 않는다.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한 고시생 종현의 뒷바라지를 알뜰 살뜰 하지만 그는 계속 낙방한다.

종현. 가난한 경찰 간부 고시생 신분에, 아버지는 몸져 눕고, 몸져 누운 아버지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 어머니는 건물 청소를 하고, 동생은 등록금 낼 돈이 없어 휴학한 상황에서 본인은 번번히 낙방한다. 이중, 삼중으로 중첩된 현실의 벽에서 유일한 빛이자 출구인 수영. 하지만 자신의 상황이 바닥으로, 바닥으로 떨어질수록 수영에겐 고마움이 아닌 미안함이, 사랑이 아닌 부담이 쌓인다. 더 이상 수영을 사랑하는지 이제 모르겠다. 그러나 그 넓은 서울 땅에서 종현이 갈 수 있는 곳은 없다. 수영의 집에서, 수영의 돈으로 산 침대에서 수영과 자면서, 스스로 남창 같다고 느낀다. 비록 연인이지만 늘 수영에게 존댓말을 쓰고, 새벽 운동을 하고, 잘생긴 얼굴에 반듯한 성품까지 갖췄지만 생활의 그늘은 그를 점점 절벽으로 내몬다.

미경. ‘좋은 아비는 못 되어도 꿀리는 아비는 되지 않겠다’ 라는 결심을 일평생실현한, 돈 많은 아버지를 둔 은행 정직원. 사실 미경도 이 소설은 주요 등장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세 명에 비해 내면 묘사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 간혹 수영에 대한 미안함과 우월감을 드러낼 뿐이다. 30대, 남성인 작가가 쓴 이 책에서 상수의 내면 묘사가 가장 길고 자세하고 납득할 만 했다는 사실은 그의 마음을 작가가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집안 배경도, 성별도, 성격도 모두 다른 미경의 내면 세계는 작가가 알 수 없는 영역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면 묘사가 아쉽지 않았나 생각한다.

오랜만에 아주 재밌게 후루룩 읽은 소설이다. 어제 오후 10시 반 부터 3시 넘도록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살아가는 일은 지루하고 지난하고 뻔하지만, 한편으로 우리 인생은  참 다채롭게 지루하고, 다채롭게 뻔하다. 그걸 보여주는 게 소설이 아닐까. 서울의 어느 은행 지점을 툭 떼어와 펼쳐 보여주는 듯한 소설. 평범하고 뻔하고 못난 상수. 그러나 그 마음의 결 하나하나는 모두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네 등장인물 중 나는 누구와 닮았을까 가늠도 해보며, 나름 약간의 반전도 있어서 지루함 없이 쭉쭉 읽어나간 소설이다.   대화도 시나리오집 읽는 것처럼 앞으로 잘 치고나가고 인물의 상황과 심리에 대한 묘사도 작가의 고민이 잘 드러났다. 밑줄 치고 싶은 문장이 많았는데, 비문학 읽듯이 읽고 싶지 않았고 이 소설의 속도에 몸은 온전히 싣고 싶어서 밑줄은 많이 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