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라면 항상 연관되어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러시아 혁명, 소비에트, 스탈린 등. 그도 그럴 것이 오웰은 이 소설은 러시아의 그것을 비판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집필했다고 <나는 왜 쓰는가>에서 밝히기도 했고, 작품의 해설에서도 동물농장의 등장인물과 러시아 혁명을 이뤄냈던 역사적 인물들과 직접 대응을 하면서 설명을 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정치적인 우화에 지나지 않았을 이 소설이 한 세대를 넘어서도 여전히 필독서가 되고 고전문학에 당당히 자리를 하고 있는 이유를 찾기란 정말 쉽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이상적인 집단은 없기 때문이다.
민중의 혁명을 이끌어낸 동기는 모두 같았다. 가까이는 동학 농민 운동부터 멀리 프랑스 혁명까지, 혁명을 이끈 주역들은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비록 전자의 경우는 실패했지만, 프랑스 혁명은 민주주의의 뿌리 중 하나로 일컬어질만한 명예로운 혁명이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등장과 그의 최후는….
“인간은 인간 말고는 그 어떤 동물의 이익에도 봉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동물들에게는 완벽한 단결과 투쟁을 통한 완벽한 동지애가 필요하오. 모든 인간은 우리의 적이며 모든 동물은 우리의 동지입니다.” p13
또 하나, 자연스레 떠오르는 혁명이 있다. 박근혜 정권에 저항하고 결국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까지 평화적으로 이루어냈던 우리들의 촛불 시위.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에도 마지않고 광화문에 모여든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같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그때 거리로 나섰던 이들이 새롭게 세운 현재의 정권은 과연 그때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동물농장은 내 손으로 뽑아놨으니 모두를 맡겨서는 안된다는 말을 상기시키게 했다. 우리는 경계를 해야만 한다. 초반의 대의가 소수의 안위만을 지키는 권력으로 변질이 되는 것은 한순간이기 때문이다.
“창밖의 동물들은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인간에게서 돼지로, 다시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번갈아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가 없었다.” p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