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에서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이 사라진다. 하루종일 감시를 받으며, 인간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고, 괴롭히는 사람과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이 따로 있고, 이 계급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이렇게 약 20년 정도를 살다 보면, 처음에는 자유로운 몸을 구속하기 때문에 발버둥도 많이 치고, 적응하지 못해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살아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구속에 익숙해져 고통스러운지도 잊게 되고, 결국 마지막에 자유를 얻었을 때는 그 자유가 자신을 힘들게 하는 무기가 되어버린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수용소의 고된 노동과 시간에 하루하루가 힘들지만, 외부로부터 온 배송물을 기대하지 않고, 그것을 왜 기대하게 되는지 이유를 모르게 되는 그 순간에, 나는 감정을 잃어버리고, 오로지 본능밖에 남지 않은 그가 너무 안쓰러웠다. 책에서 이반 데니소비치는 덤덤하게 맡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 나오지만, 그 모습을 지켜본 제 3자의 입장에서는 그 모습이 한편으로는 불쌍하게 느껴졌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빅터가 전쟁이 끝나고 자유를 되찾은 수감자들은 자유를 얻은 것에 대해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어색해하는 것을 경험했다고 밝힌바 있다. 이반 데니소비치도 어쩌고보면 이제는 구속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마지막에 자유가 찾아왔을 때,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된 처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