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지 못한 세계

시리즈 세계문학전집 38 | 서머싯 몸 | 옮김 송무
출간일 2000년 6월 20일

스트릭랜드는 증권맨으로 두 자녀와 부인을 두었다. 다소 무뚝뚝해보이는 얼굴과 우람한 덩치의 그는, 작고 귀여운 아이들과 문학을 애호하는 부인과 함께 중산층 가정의 전형으로 보이는 삶을 이어갈 수도 있었다.

어떤 기색도 예고도 없이 홀연히 가장의 역할과 직업을 내던진 그는 기괴하고 이해불가능한 생활에 뛰어든다. 화가가 된 그에게 세속적 기준에 부합하는 상식과 윤리 따윈 없었다. 가족을 버리고, 병든 자신을 극진히 간호해준 화가를 배신하고, 그의 부인을 유혹하고, 타히티 섬으로 떠나 그곳 원주민과 결혼하고, 병에 걸려 죽는다. 이는 6펜스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눈으로 본 그의 삶이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 는 갑작스런 내면의 충동이었을지 ‘그림을 그려야 한다’, 는 내적 악의 속삭임 때문이었을지 모르나 그는 그림 이외의 생활은 가치판단의 대상도, 목적도 될 수 없는 사람으로 변모했다. 그에게는 오로지 물감과 붓만 필요했기에 어떠한 형태의 보살핌도, 연인도, 돈도 필요 없었다. 가정이라는 인습의 공동체는 그를 옭아매는 굴레에 불과했고, 그는 동료를 배신한 일도 동료의 부인을 유혹한 적도 없던 사람이었다. 선의를 베풀거나 매혹을 느낀 건 그들의 감정일 뿐 그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다.

이 소설은 느닷없이 6펜스의 세계에서 뛰쳐나와 달의 세계로 들어간 한 예술가의 이야기다. 6펜스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달의 세계로 간 화가의 모습은 충격적이기도 하지만, 가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사람이라면 해방감 또한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소설이다.

작중 화자가 만난 스트릭랜드 주변의 많은 인물은 6펜스의 세계에 안주한 채 달의 세계로 간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비웃는데, 부와 명예를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그들의 말과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저자가 조롱하는 대상을 알 수 있다. 그 점에서 이 책은 속물적인 사람들로 가득찬 세태를 꼬집는 풍자소설이기도 하다.

등장 인물들은 어느 세계에 속해 있건 번민과 고뇌가 끊이지 않았다. 세속적 가치에 연연해하는 사람들은 남의 이목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즐기지 못했으며, 붓을 든 스트릭랜드는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충동과 갈급으로 괴로워했다.

달은 환상의 세계, 내재된 욕망이나 충동, 이상향의 은유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달을 품고 살아간다. 현실에 디딘 발을 차마 떼지 못한 채. 안온한 삶을 버리고 미혹하는 세계로 가야만 했던 한 예술가의 삶, 이 이해불가능한 인물의 자취를 추적하는 서머싯 몸의 필치는 유려했다. 소설이나 그림 등 예술작품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 또한 잘 드러나 있는 소설이다.

고갱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로, 서머싯 몸은 고갱의 삶을 소설화하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작중 스트릭랜드는 실제 고갱의 삶과 닮은 점도 많지만, 그림을 그리게 된 전후 사정부터 차이가 크다. 이는 작품해설을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다. 재미있는 소설인데, 이 책은 작품해설마저도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