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엽감은새를 읽은 후, 다시 하루키의 소설에 도전해보게 되었다. 하도 유명하고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이 너무 멋있어서 읽어보고 싶었는데, 태엽감은새 연대기라는 책과 비슷하게 난해하다.무언가 의미를 많이 부여했다는 느낌이 드는 부분들이 많은데, 독자들의 호불호가 갈리는 하루키 특유의 적나라한 성적인 장면은 역시나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확실히 섹슈얼하다는 느낌보다는 갈증같은, 열렬하지만 공허한 빛좋은 개살구같다는 느낌이 많이든다. 그를 통해 현대인의 인간관계에 대한 고독, 삶에 대한 허무감, 공허감을 더 나타내려는 건 아닐까? 어쨌든 그런점에서 이책의 제목으로는 상실의 시대가 더 잘 어울리지 않나 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사실 이 책을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도저히 말 못하겠다. 그런데 뭔지 알겠다. 죽은자들뒤에 남은 산자들의 공허함. 그것만큼은 아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하루키는 잘 모르겠다. 스타일은 알겠지만 아직 나에겐 난해한 작가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잠겨있다.’
그것은 분명 진실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죽음을 키워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나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어떤 성실함도,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 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