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온몸이 움찔하고 정신이 아찔해졌다… 내 곁의 담장 너머에, 검은 머리를 짧게 깎아 올린 어떤 사내가 비웃는 눈초리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서 있었다. 그 순간 그 처녀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표정이 풍부한 활기찬 얼굴에서 빛나는 커다란 회색 눈동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그 얼굴 전체가 갑자기 떨리면서 웃음을 띠었다. 하얀 이가 반짝 빛났고 눈썹은 약간 야릇하게 위로 치켜 올라갔다.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땅바닥에 떨어진 엽총을 주워 들고는, 커다란 그러나 짓궃은 데는 없는 호탕한 웃음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내 방으로 도망쳐 들어와 침대에 몸을 던지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 쳤다. 나는 몹시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 즐겁기도 했다. 나는 지금껏 경험해 본 일이 없는 흥분을 느꼈던 것이다. 16-1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