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주로 진행하는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고전 목록을 만들어주고 순서에 따라 읽어 함께 토론하는 모임인데, 처음에는 자유 주제 독서를 하려다가 나에게 조금 강제성을 줄 겸 혼자서는 도전하기 어려운 고전의 영역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번 회차의 선정도서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불한당들의 세계사>였다.
불한당들의 세계사
내용은 크게 어렵지않다. 다만 서술의 방식이 현대의 것과는 다른 면도 있고, 또한 소설의 구조의 특징 상 빠르게 읽히지는 않는 편이다. 제목처럼 전 세계의 악당? 불한당? 등의 일대기를 모아 독자에게 알려주는 방식이다. 각 단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흑인 노예들을 꾀어 탈출시킨 후 다시 잡아 판매하는 수법을 자행하는, 라자루스 모렐.
- 영국 귀족의 아들을 사칭한, 톰 카스트로.
- 청나라 시대의 유명한 여자 해적, 칭.
- 서부시대 갱단의 두목, 몽크 이스트맨.
- 서부의 무법자 빌리 더 키드, 빌 해리건.
- 주군을 죽음에 빠뜨리게 한 고 수께 노 수께, 그리고 그에게 복수한 47인의 무사(주신구라).
- 문둥이 사이비 지도자, 하킴 데 메르브.
- ‘나’에게 칼로 죽임을 당한, 프란시스코 레알.
- 위의 8개의 에피소드와 그 외 기타 등등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단편들.
포스트모더니즘? 상호텍스트성? 독자의 역할? 그리고 대중문화?
이쯤되니 10년도 전에 대학시절 졸면서 배웠던 교양시간의 ‘포스트 모더니즘’ 내용이 생각난다. 그리고 발터 벤야민의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도 떠올랐다. 발터 벤야민은 인쇄와 영화상영과 같은 기술의 발달이 원본이 가지는 아우라를 없애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사진이나 영화와 같이 원본을 복사한 사본들이 대중에게 보급이 되면서, 굳이 원본이 아니더라도 작품이 가지는 의미가 대중에게 전달이 된다는 의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시에 사진이나 (시간적인 제약으로 장면의 열거로 이루어지는)영화들의 특성 상 원본에 내재된 전후의 스토리가 아닌 순간의 해석이 중요한 영역이 되었다 주장했다. 원본으로 하여금 아우라를 가지게하는 배경으로서의 스토리를 배제한 채, 순간의 장면에 해당하는 하나의 파편의 열거로 각자의 해석을 요구하게 되니 결과적으로 대중의 해석이 작품의 의미를 부여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린 셈이다. 이게 흔히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징으로 부각되는, 대중성, 자율성, 복제성, 이성보다는 감성적 등등의 내용이다.
이 작품은 그러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요소를 소설로 표현하고 있는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직접 이야기를 창조해낸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이야기를 파편적인 장면으로 재구성하여 전달하고 있는데, 생략된 내용들이 독자에 의해 자의적으로 해석이 되면서 정작 독자가 이해하는 이야기들은 원작의 이야기와 다른 새로운 작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독자의 해석에 따라 작품의 의미가 달라진다면 과연 원본이 가지는 특별한 의미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나? 해석하기에 따라 모든 결과물이 새로운 원본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걸 벤야민은 유식한 말로 원본의 아우라가 상실되었다 이야기한 듯하다.
또 이처럼 원작을 차용하여 재편집을 통해 서술하는 방식을 유식한 말로 상호텍스트성이라고 하더라. 이런 양식의 서술을 역으로 이용한 부분도 있는데, 그게 ‘장미빛 모퉁이의 남자’ 부분이다. 이 챕터만큼은 기존의 원작을 재구성하는 방식이 아닌 소설 속 화자가 저자에게 보내는 편지의 양식으로 서술되고 있는데, 저자가 곧 독자가 된다는 의미로서의 상호관계를 완전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아마도 보르헤스가 이 책을 통해 하고자 했던 것은, 무언가의 사건과 작품을 이해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해석에 의해서 얼마나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 아니었을까? 유독 소설 내에서 규칙이 적혀진 문서나 법률구문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나타나는 것도, 제시되는 서술을 최대한 정적인 장면으로 한정지음으로해서 독자의 개입여지를 늘리기 위한 일종의 장치가 아니였을런지 추측해본다.
이처럼 작품이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고 완성되기까지 독자(수용자)의 역할을 확대한 것, 그리고 복제 기술을 통한 물리적인 보편적 보급을 통해 대중문화라는 것이 만들졌음을 고려할 때 이러한 시도는 아주 큰 업적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복제, 보급, 그리고 재해석의 영역은 결국 상업적인 영역으로 필연적으로 연계될 수밖에 없었다. 오늘 날 대중문화가 지나치게 상업화되었음을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있는데, 그건 태생적인 가질 수 밖에 없는 문제점이다. 상호텍스트성과 수용자의 해석을 강조한 나머지 대동소이한 창작물만 나타나게 되고, 그 의미마저 짧은 시간동안만 효용을 가질 뿐 금방 소모되어 가치없게 되는 오늘 늘의 현상 역시 태생적인 속성에 기인한 필연적인 현상인 셈이다.
걸그룹 음악과 90년대 음악,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과 대중문화
30대에 접어들면서 내가 가장 아재가 되었구나를 느끼는 순간을 꼽으라면 , 단연코 ‘모르는 걸그룹’들이 인기를 끌고 있을 때, 그리고 그들의 노래가 이해되지 않을 때를 꼽고 싶다. 대중문화의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는 ‘걸그룹’을 모르고 이제는 아예 이해하려 시도조차 하지않는 꼰대가 되어버린 것 같아 슬픈 마음도 든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90년대의 가사가 쏙쏙 들리는 노래들이 좋다.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사실 그건 노래의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내 귀가 시간이 지나서 막혀버려서도 아니다.
90년대과 2000년대의 노래는 가사의 역할이 아주 중요했다. 노래라는 것이 하나의 문학작품처럼 여겨졌기에 스토리가 있어야 했고, 그 스토리를 통해 감정을 극대화하는 느낌으로 음을 이용했다. 그러다보니 음에 부합하는 내용의 가사가 중요했고, 그 가사를 잘 전달하는 것이 가수의 중요한 능력이었다. 이런 노래들을 몇번 곱씹어 듣다보면 스토리가 외워지고 청자는 그 스토리를 통해 가사를 기억하곤 했다. 노래를 통한 간접경험 혹은 대리만족의 느낌이 있었다. 심지어 가사가 없는 고전음악들도 서사별 스토리와 흐름이 존재했다. 긴 호흡의 있는 그대로의 전체 스토리를 모두 들려주고, 그것을 수용하게 하는 것이 그때의 방식이었다.
반면 오늘 날의 대중문화의 대표격인 걸그룹의 노래나 힙합문화 같은 경우엔 그런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다. 단어와 문장 만으로는 알 수 없는 구호를 반복해서 외치거나, 아주 단편적인 단어를 간간히 열거함으로 해서 어떠한 느낌과 이미지를 전달하는 노래들이 대부분이다. 기승전결의 노래구조보다 귀에 꽂히는 후크송이 더 인기가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그 가수마저 춤이나 의상과 같은 외형에 더 치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선적인 아날로그 방식이 아닌 점적인 디지털방식의 대중문화는 스토리를 전달하기보다 순간순간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중 역시 이러한 콘텐츠의 소비가 굉장히 빨라졌고, 지루한 스토리를 듣기보다 빠르게 소모할 수 있는 현재의 대중문화에 익숙해져 더 편하게 느끼게 되었다.
나는 그럼에도 아날로그가 좋고, 알 수 없는 이미지보다는 스토리가 좋고, 노래를 곱씹으며 머리 속으로 스토리를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이 좋다. 이런 나의 취향이 대중들이 추구하는 문화적 선호와 동떨어진 것일가봐, 그렇게 아재가 되어버린 것일까봐 조금 서글플 뿐이다.
마무리하며
이야기가 너무 삼천포로 새버렸다. 작품의 완성에 있어 독자의 역할(해석)의 강조하는 보르헤스의 이러한 방식, 포스트모더니즘의 방식은 기존의 수동적이기만 했던 독자에게 해석을 통한 의미부여 역할을 위임하여, 보다 능동적인 역할을 부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덕에 한 작품에 대해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나만의 지멋대로 포스팅도 할 수 있고 말이다. 다만 최근에 이런 파편화된 이미지의 전달과 대동소이한 컨텐츠 소비가 극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에서, 저자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특정 철학과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의 창작물의 역할도 존중이 되었으면 좋겠다. 창작자가 무슨 의미를 전달하고 싶은지, 이 작품이 가지는 본래의 그 메세지가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는 일이니까. 문학과 문화에 대해서 쥐뿔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저자는 저자의 역할을, 독자는 독자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좋은거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