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나를 보내지 마>에서는 복제인간을 통해 ‘인간성’에 대해 통찰했다면,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은 충직한 집사 스티븐스를 통해 ‘직업의식’과 ‘품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소설은 한 집안의 집사로 평생을 보낸 스티븐스가 여행을 떠나면서 자신의 인생을 회상하는 형태로 전개된다. 누가봐도 답답하고 미련스러울 만큼 충성스럽고 근면했던 스티븐스,, 그의 주인인 달링턴 경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릇된 선택을 했다고 해서 스티븐스의 헌신과 그 가치가 퇴색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스티븐스가 소설 전반에 걸쳐 자신을 과하게 정당화하는 것은 실은 자신의 과오를 알기 때문에, 이를 후회하기 때문이 아닐까.
해가 저물어 가는 저녁, 스티븐스는 더이상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남아 있는 시간들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품고자 한다. 그것이 새로운 주인을 위해 농담을 숙련하는 것이 아닌, 부디 그 자신을 위한 삶이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생각과 느낌이 드는 책이 아닐까 싶다. 나에겐 스티븐스의 타인을 위한 삶이 안쓰럽게 느껴졌지만, 어쩌면 그에게는 그것만이 목표이자 전부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역시나 가즈오 이시구로 특유의 깊은 정서와 무게감이 빛을 발하는 소설이었다.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하긴 그렇다. 언제까지나 뒤만 돌아보며 내 인생이 바랐던 대로 되지 않았다고 자책해 본들 무엇이 나오겠는가? (…) 내 인생이 택했던 길을 두고 왜 이렇게 했던가 못했던가 끙끙대고 속을 태운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진실되고 가치있는 일에 작으나마 기여하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그리고 누군가 그 야망을 추구하는 데 인생의 많은 부분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결과가 어떻든 그 자체만으로도 긍지와 만족을 느낄 만하다. (p.30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