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보다는 소설평이 더 좋았던 소설.

“나더러 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솔직히 나라는 존재에 대해 무관심했잖아? 나라가 나를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지켜 줬다고 하는데, 나도 법 지키고 교육받고 세금 내고 할 건 다 했어.

내 고국은 자기 자신을 사랑했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를. 그래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 줄 구성원을 아꼈지. 김연아라든가, 삼성전자라든가. 그리고 못난 사람들한테는 주로 ‘나라 망신’이라는 딱지를 붙여 줬어. 내가 형편이 어려워서 사람 도리를 못하게 되면 나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내가 국가의 명예를 걱정해야 한다는 식이지. 내가 외국인을 밀치고 허둥지둥 지하철 빈자리로 달려가면, 내가 왜 지하철에서 그렇게 절박하게 빈자리를 찾는지 그 이유를 이 나라가 궁금해할까? 아닐걸? 그냥 국격이 어쩌고 하는 얘기나 하겠지.”  (170쪽)

라는 주인공의 고백에 충분히 공감을 하고,

 

“밥을 먹는 동안 나는 행복도 돈과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 행복에도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이 있는 거야. 어떤 행복은 뭔가를 성취하는 데서 오는 거야. 그러면 그걸 성취했다는 기억이 계속 남아서 사람을 오랫동안 조금 행복하게 만들어 줘. 그게 자산성 행복이야. 어떤 사람은 그런 행복 자산의 이자가 되게 높아. (중략) 어떤 사람은 정반대지. 이런 사람들은 행복의 금리가 낮아서, 행복 자산에서 이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아. 이런 사람은 현금흐름성 행복을 많이 창출해야 돼.” (184-185쪽)

라는 주인공의 행복론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성취한 기억으로 조금씩 오랫동안 행복감을 느끼는 ‘자산성 행복’이든, 어떤 순간 짜릿한 행복을 느끼는 ‘현금흐름성 행복’이든, 효율성의 잣대로 손익을 계산하는 한 계나는 행복할 수 없다. (중략) 경제적 감각에 침윤된 관점이 변하지 않으면 그녀는 틀림없이 불행해진다

앞에서 나는 다양한 형태로 우리에서의 탈출을 꿈꾸고 결단해야 한다고 썼다. 탈출은 어디인가로 도피하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상 한국 사육장의 외부에는 외국 사육장이 있을 따름이다. 달아나도 가축으로밖에 생존할 수 없다. 언어와 문화가 상이할수록 그렇게 살 확률은 커진다. 그렇다면 진정한 탈출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육장 내에서 가축이라는 포박을 풀어내는 데 달려 있다. 사육 이데올로기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사육장의 주인을 쫓아내야 한다. 계나는 반문할 것이다.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워서 이기는 게 멋있다는 건 나도 아는데…… 그래서, 뭐 어떻게 해? 다른 동료 톰슨가젤들이랑 연대해서 사자랑 맞짱이라도 떠?” 나는 답변할 것이다. “톰슨가젤들이랑 사자랑 맞짱뜨자는 게 아니야. 톰슨가젤들이랑 사자랑 연대해서 우리를 부숴버리자는 거지.” 이것이 사육장 너머를 지향하는 내가 최종적으로 도출한 방안이다.”

라는 허희 문학평론가의 평론이 더 설득력 있었다. 물론,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톰슨가젤과 사자와 연대하는 것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현실성이 없다고, 이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꿈은 꿔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많은 것들도, 한 때는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것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