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부패한 권력을 향해 사이다를 뿜어내는 영화가 나는 불편하다. 이유는 많다. 남성 중심의 서사가 대부분인 데다가, 국가권력이나 기업윤리와 관련된 ‘큰 정의’를 주로 다루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통해 정의에도 순번이 매겨지는 것 같아 씁쓸하고, 늘 ‘대의’에게 번호표를 양보해야 하는 ‘하찮은 정의’가 서럽다. 선명하게 나눠진 선과 악의 구도 역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나쁜 놈은 대체로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은 양반들이다. 그럼 선한 쪽은? 선은 주인공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관객의 몫이다. 약하고 돈 없는 역할에 자신을 이입하는데 익숙한 관객들은, 딱 그만큼 자신에게서 악을 덜어낸다. 악의 이미지를 보면서 울분을 토할수록 우리는 악에서 멀어진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악을 분리해 낸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그렇게 선으로 가득한 세상에, 한나 아렌트가 말했다는 ‘평범한 악’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애당초 선과 악이라는 게 서로의 반대편에 놓인 채로 간단하게 처리되어도 괜찮을 걸까.
‘데몬’(demon/daemon, 악령)과 발음이 비슷한 해서인지 『데미안』(demian)은 차갑고 어두운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데미안』은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가 1919년에 세상에 내놓았다. 헤르만 헤세라는 본명을 감추고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세상에 내놓은 『데미안』이 독일 내 권위 있는 문학상인 ‘폰타네 상’을 받자, 한 독자가 문체를 분석하여 『데미안』이 헤르만 헤세가 쓴 작품임을 밝혀냈다고 한다.
워낙 유명한 탓에, 책을 펴보지 않은 사람조차도 스스로가 소설을 읽었을지도 모른다고 믿게 만드는 소설 『데미안』은 전형적인 성장소설처럼 보인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123)라는 익숙한 문장이 전해주듯, 『데미안』은 소년 싱클레어가 알을 부수고 나와 바깥으로 나와 성인이 되어가는 성장소설의 형식을 취한다. 서술방식도 단순하다. 소설은 싱클레어의 성장을 순차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그를 성장하게 하는 동력 역시 데미안을 비롯한 외부 인물들과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다소 통속적이다. 이야기가 재미있는 것도 아니다. 주인공 싱클레어가 마을 악동인 크로머 때문에 고통을 받는 중에, 데미안에게 구원을 받는 장면까지는 무척 흥미진진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관념적인 사고들로 가득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여전히 『데미안』을 읽고 있는 걸까.
첫 장 제목 <두 세계>가 노골적으로 보여주듯 어린 싱클레어에게 세상은 이분법적이다. 선과 악, 남자와 여자, 신과 악마, 포근하고 안전한 아버지의 집과 자신을 억압하면서도 매혹적인 크로머의 통치 등, 이 세계는 두 개로 쪼개져 대립하고 있다. 어느 날 싱클레어는 동네 골목대장인 크로머의 세계에 끼고 싶어 내뱉은 하찮은 거짓말 때문에 크로머의 노예가 된다. 그로 인해 어린 싱클레어는 아버지와 크로머의 세계 사이에서 뼈가 마르는 듯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낸다. 아버지의 안락한 세계는 악마에게 저당 잡힌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으며, 싱클레어는 더 이상 포근한 세계를 누리지 못하게 될 거라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런 싱클레어를 구원해 준 존재가 데미안이다. 데미안은 크로머로부터 싱클레어를 건져낼 뿐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그를 유혹한다.
저자는 그 세계를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때문에 관념적이다. 설명해보자면 그것은 두 쪽으로 쪼개진 단순 명료한 세계가 아니라 구분이 모호하며 경계가 붕괴된 세계다. 성별이 구분되지 않으며 나이를 알 수 없고 선과 악이 서로를 침투하는 세계다. 악을 대표하던 성서 속 인물 카인은, 연약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도덕에 억눌린 존재이며, 도덕의 노예들이 악으로 규정한 존재이다. 데미안은 아벨이 되고자 했던 싱클레어를 카인의 세계로 이끈다. 데미안은 또한 카인의 세계가 형상화된 인물이다.
“나는 데미안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소년의 얼굴을 가지지 않고 어른의 얼굴을 가졌다는 것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보았다. 보았다고, 혹은 감지했다고 믿었다. 그것이 남자의 얼굴만이 아니며 또 다른 무엇이라는 것을. 여자 얼굴도 조금 그 안에 들어 있는 듯했다. 특히 그 얼굴은 내게, 한순간, 남자답거나 어린이답지 않고, 나이 들었거나 어리지 않고, 왠지 수천 살은 되게, 왠지 시간을 초월한 듯, 우리가 사는 것과는 다른 시대의 인장이 찍힌 듯 보였다. 짐승들이 아니면 나무들, 아니면 별들이 그렇게 보일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성인이 되어 거기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그때는 알 수 없었고, 정확하게 느끼지 못했다. 다만 뭔가 비슷한 것을 느꼈을 뿐이다. 어쩌면 그는 미남이었을 것이고, 어쩌면 내 마음에 들었을 것이고, 어쩌면 내게 거슬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것 또한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내가 보았던 것은 오직, 그가 우리들과는 달랐다는 사실, 그는 한 마리 짐승 같았다는 것, 아니면 유령, 아니면 어떤 형상 같았다는 것이다.”(69)
소설 중반부터는 위와 같이 관념적이면서도 몽환적인 표현이 반복된다. 데미안을 묘사할 때뿐 아니라, 싱클레어가 성장해가는 과정 중에 만나게 되는 모든 것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그 내용이 신비하게 그려진다.
“다만 서서히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이 완전히 내면적인 영상과 바깥으로부터 내게로 온, 찾아야 할 신에 대한 신호 사이에서 하나의 결합이 이루어졌다. … 희열과 오싹함이 섞이고, 남자와 여자가 섞이고, 지고와 추악이 뒤얽혔고, 깊은 죄에는 지극한 청순함을 통해 충격을 주며, 나의 사랑의 꿈의 영상은 그러했다. 그리고 압락사스도 그러했다. 사랑은 이제 더 이상, 처음에 겁을 먹고 느꼈던 것처럼 동물적인 어두운 충동이 아니었다. …. 사랑은 그 둘 다였다. 둘 다이며 또 훨씬 그 이상이었다. 사랑은 천사상이며 사탄이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였고, 인간과 동물, 지고의 선이자 극단적 악이었다. 이 양극단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운명으로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맛보는 것이 나의 운명으로 보였다. 나는 운명을 동경했고, 운명을 두려워했지만, 운명을 늘 거기 있었다.”(127)
저자는 두 세계가 하나로 섞이고 결합되어야 한다고 일관되게 말한다. 두 쪽으로 쪼개진 명료한 세계가 어린 싱클레어의 집이라면, 구분이 허물어진 집 바깥은 데미안의 거처다. 헤르만 헤세는 싱클레어와 독자들을 바깥으로 초대한다. 선과 악의 경계가 허물어진 곳이야말로 인간이 살아야 할 새로운 장소다. 데미안은 선과 악으로 쪼개진 세계를 뚫고 치솟아 오른 ‘초인’이다. 싱클레어에게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일은 곧 데미안이 되는 것이다. 싱클레어는 너무도 명료한 선, 즉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한다. 아늑한 듯 보이는 아버지의 집은 사실상 ‘어린 인간’에게 죄라는 덧을 씌워 공포의 노예로 만드는 크로머인 동시에 아버지이다. 그들은 협력자다. 싱클레어가 깨부숴야 할 알은 이원론적 세계이며, 아버지의 집이다. 이원론적 서구는 부수어져야 하며, 아버지는 죽어야 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의 점액과 알 껍질을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사람은 모든 유래가 같다. 어머니들이 같다. 우리 모두는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이며 투척이지만 각자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9)
『데미안』은 성장 소설일까. 소설은 싱클레어가 성인이 돼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사춘기 진통 같은 것에는 무관심한 듯 보인다. 『데미안』은 성장기가 아니라, 한 인간이 ‘초인’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인간 이상의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이 되어가는 이야기인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이 성장이다. 저자는 그렇게 ‘주장’한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인도에서 머물렀던 저자의 독특한 이력 때문인지, 『데미안』은 시종일관 신비주의적이고 몽환적이다. 저자의 세계관 역시 서구적 이원론보다는 동양적 일원론에 가까워 보인다. 『데미안』은 인간에 대한 헤르만 헤세의 견해와, 이원론적 세계가 허물어진 세계에 관한 그의 지향을 끈질기게 그려낸 이야기다.
『데미안』을 통해 우리는 다양한 주제를 고민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이분법적 세계, 규정된 윤리, 이상적인 공동체, 더 나아가 무성(혹은 중성)적으로 그려지는 그의 성별관념을 통해 젠더(gender)에 관한 논의까지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데미안』은 여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미안』이 좋은 소설인지에 관한 의구심이 생기는 이유는 뭘까. 노벨상까지 수상한 그의 필력이나 문학적 소양에 감히 의문을 제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몽환적이고 신비스럽기까지 한 그의 글과는 달리 그가 제시하는 인간이 뚜렷해 보이기 때문이다. 『데미안』은 드러내기 보다는 주장하는 듯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니체의 ‘초인’을 데미안으로 형상화한 듯 보인다. 아니, 그가 제시한 것이 누구이건 간에, 하나의 인간을 ‘주장’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내게 『데미안』은 문학보다는 철학 같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