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순간 저미는 것들만이 삶은 아니란 얘기

출간일 2009년 6월 30일

면도날 ㅡ서머싯 몸
책을 덮으며 작가의 연력을 읽고 아흔에 일생을 마친 시간을 헤아려보니 그리 먼 시대가 아닌 것에 또 깜짝 놀란다 . 시대감을 도무지 못느끼겠다고 방방 뜬 내가 잠시 무안해졌고 작풍속의 의상이나 취향은 조금더 거슬러 올라간 듯 보였는데 , 영화같은 걸로만 그 시대 배경을 상상해온 터라 실제 시기와 차이가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 그의 유명작 달과 6펜스나 인간의 굴레는 나도 가지고 있는 오래된 책이다 . 어릴 때 읽었으니 이젠 책 등의 색이 바래기도 했을만큼 ㅡ
그런 내겐 작가 연력을 살피는 독특한 습관이 하나있는데 바로 내 아버지가 출생한 날로부터 시대를 거슬러 간다는 다소 어처구니 없는 방법이 그것이다 . 내가 출생한 시점이 아닌 아버지의 시대로부터 가야 어쩐지 모든 이야기가 구체성을 갖고 더 친밀해진다 . 나에게 이야기란 바로 아버지의 음성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 분명 아버지도 이 책들을 보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격동의 제 5공화국 얘기들 만큼 눈을 빛내며 보셨을 거란 막연한 상상이 나를 즐겁게 한다 . 그런데 신기한건 지금 아버지의 나이는 도무지 상상도 계산도 가 닿지 않곤 해서 안타깝고는 했다 . 죽은이의 나이란 그런 것인 모양이다 .
면도날이 출간된 해는 아직 아버지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3년 전이란 계산이 나오고는 당혹스러워져서 길게 시작을 해 봤다 . 1944년에 출간된 책이 내겐 아주 멀고 먼 곳의 이야기로 읽히면서도 전혀 지루할 틈도 없었으니 그건 그만큼 작가가 당시 세계를 잘 반영해 넣은 탓이 아닐까 싶다 . 물론 수많은 시대 영화들도 상상을 도왔고 책장마다 스쳐간 영화만도 셀 수 없을 지경이니 말 다했구나 싶다 .
제목부터가 날이 예리한 쇠붙이라 대체 얼마나 심오한 것들을 썩썩 저며 넣은 걸까 하는 기대감이 컸는데 , 책을 읽다보니 내 어이없는 기대가 무너졌다가 다시 층을 쌓는 , 마치 모래성 같았다 . 나라는 자아가 없이는 이계도 뭐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고마니 심오란 역시 현실 속 삶에 닿아 있는 것이구나 싶기도 했고 말이다 .
이 글은 소설가 몸의 주변 상황들을 극화해 놓은 듯한 이야기이다 . 얘기를 들려주는 자 역시 주인공이지만 등장 인물 모두가 주인공 같은 소설이고 누구도 밉지 않은 시선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의 예리함이 빛나는 멋진 부분 아닌가 했다 .
40여년을 벗하는 친구 , 엘리엇 그의 누이와 조카인 딸 이사벨 , 이사벨의 약혼자였던 래리 , 경제 대공황에 도산을 맞는 이사벨의 남편 그레이 , 그리고 작가인 몸이 알고 지내며 그들과 인연이 겹치던 주변인들까지 이야긴 30부작 드라마 쯤 만들어도 될 만한 시간을 폭풍처럼 쏟아붓는다 . 드라마틱하다는 말을 이럴때 쓰는 거겠지 .
작가는 엘리엇과 함께 그의 어여쁜 조카이자 숙녀인 이사벨에 끊임없는 , 애정이 담긴 시선을 보내면서 그 이유는 정작 약혼자이자 파혼자가 되는 래리에 고정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 그는 다소 특이한 인생을 걷는 이 청년에게 작가적 호기심으로 다가갔을거란 생각도 하게 되면서 그들을 인연하게 한 엘리엇과의 에피소드도 재미있게 그려내 인물들을 한층 입체적으로 만든다 .
1차 세계 대전 후의 정신적 공황을 맞지만 그 시간들이 기특한 자아 찾기로 이어지기에 결코 헛된 방황으론 보이지 않는 래리의 인간으로의 성장 기간을 따듯한 관심으로 지켜본다 . 약간 촌수가 먼 친척 아저씨 심정이 아니었나 읽히기도 하는데 , 그건 그들을 계속 보살펴야 한다고 믿는 수다쟁이 이웃같은 엘리엇의 영향이 그에게도 미친 걸로 나는 그리 읽었다 . 그들과 알게 모르게 가족 같은 연대를 느낀 게 아니었을까 싶으면서 .
결과적으로 책 속 작가 몸이 생각한 해피엔딩에 나는 동감을 한다 . 막바지에 불행한 죽음으로 끝난 소피가 안쓰럽긴 했지만 그녀는 나름 자기 인생을 사느라고 살았기에 그런 죽음에도 자신은 정작 우리가 보는 불행을 느끼지 못할거란 생각도 얼핏 들었고 . 그런 그녀를 빼곤 대체로 모두 평범이라면 평범이고 남다른다면 남다른 삶을 성공(?) 적으로 산 걸로 보이니까 . 그들의 살이는 그렇게 치열하여 더 곱고 이뻤다 .
누군가의 한 평생을 다 봐 왔어도 결코 끝은 알수 없는 사람의 면모가 늘 호기심으로 우릴 이끌듯 다양한 인연들의 심리들을 잘 그려놓은 이 작품에 , 나는 굶주렸던 차에 서머싯 몸이 내어준 따듯하고 맛있는 죽을 막 비우고 난 후 빈 그릇에 차분하게 감도는 하얗고 투명한 김을 바라보는 순간처럼 아쉽고 아련한 만족으로 이 책 면도날을 덮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