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경쾌하게도, 퐁.”
사랑과 미움이 뒤엉키고
예쁜 기억과 아픈 실제가 뒤섞일 때
이유리가 전하는 명랑한 이별법
마침내 다시 시작하는 사랑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 『모든 것들의 세계』, 연작소설 『좋은 곳에서 만나요』 등을 통해 현실을 돌파하는 능청스럽고 사랑스러운 상상력을 선보여 온 소설가 이유리의 신작 소설집 『비눗방울 퐁』이 출간되었다. 202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빨간 열매」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유리는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과 위트 있는 문장으로 독자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아 왔다. 이유리가 펼치는 환상적인 이야기의 매력은 현실에 단단히 발붙인 채 어떠한 낭만도 거부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간다는 데에 있다. 『비눗방울 퐁』에서 이유리가 반복적으로 그리는 현실은 이별이다. 누구도 이별을 피할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든 떠날 수 있고, 모두가 죽음을 맞는다. 필연적인 이별을 마주한 이유리 소설의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별의 고통을 견뎌 낸다. 함께였던 기억을 팔아 버리고, 기쁨과 슬픔을 우려내어 술을 빚고, ‘우리’가 ‘너’와 ‘나’가 되었음을 서서히 받아들이며 떠나간 이의 평안을 빌어 준다.
하나였던 둘이 떨어져 나와 홀로서는 과정은 처절하고 고통스럽다. 이유리는 해피 엔딩을 위해 이별의 고통을 축소하지 않고 이별의 과정에서 떠오르는 복잡한 감정들을 모른 척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것들을 곱씹고 돌파할 쾌활한 상상과 명랑한 유머를 펼쳐 보인다. 사랑이 끝난 자리에서 잊고 회복하고 다시 사랑하려는 인물들은 매력적이다. 고통받는 이 인물들은 사랑의 한가운데에서 행복한 그 누구보다 아름답다. 유명한 노랫말처럼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유리의 소설은 경쾌한 재미에 더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소설가 박서련의 말대로, 독자들은 ‘매일 이별하며’ 라고 선창하는 이유리를 따라 ‘살고 있구나’ 하고 따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살고 있구나, 라는 평범한 말의 아름다움에 조금 놀라면서.”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사랑이 끝났다. 상황이 바뀌었고, 사람은 변했고, 다만 갈 곳 잃은 사랑만이 남았다. 찌꺼기처럼 남은 이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할까? 『비눗방울 퐁』에는 SF적 상상력과 환상적인 이야기를 가로지르는 이유리식 이별법이 담겨 있다.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는 사랑의 기억을 남에게 전이시켜 이별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이의 이야기다. 아름다운 사랑의 기억과 현실의 고통 사이에 있는 인물은 「크로노스」에도 등장한다. 치매에 걸리기 전 엄마의 모습을 복원한 딸은 너무나 진짜 같은 가상의 엄마 앞에서 기뻐하고 괴로워한다. 치매에 걸린 현실의 엄마 대신 기억 속의 다정한 엄마를 만나 위로받아도 괜찮은 걸까, 자문하면서. 이별이 이처럼 고통스럽고 깔끔하지 못한 이유는 사랑이 그만큼 깊었기 때문이다. “그토록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이토록의 이별도 아니었을 것.”(박서련) 이별이 아프지 않을 수 없는 사랑을 했던 이유리 소설의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고통을 마주한다. 「담금주의 맛」에서 이별의 주인공은 급기야 아름다운 기억과 헤어짐의 고통을 우려내어 오색의 술을 빚는다. 이유리가 선보이는 다채로운 이별의 색깔은 결국 그만큼의 사랑의 빛깔이다.
사랑과 생활
사랑의 현실은 어떨까? 『비눗방울 퐁』에서 그리는 사랑은 애틋하고 귀여운 한편 지난한 현실 그 자체다. 같은 공간에 사는 커플들의 생활은 지겹도록 반복된다. 「보험과 야쿠르트」는 각각 보험과 야쿠르트를 파는 레즈비언 커플의 이야기다. 더 나이 들기 전에 결혼해서 가족을 꾸려야지, 라는 조언을 듣는 두 사람은 적은 수입으로 집세와 생활비를 감당하고 서로의 지친 일상에 기댈 곳이 되어 준다. 「퀸크랩」 역시 “킹크랩을 배가 터지도록 한번 먹어 보는” 것이 소망인 커플의 귀엽고 애틋한 한바탕 소동극이다. 서로의 못난 구석까지 보듬고 지친 하루의 끝에 다정한 농담과 위로를 주고받는 것. 이유리 소설 속 연인들이 사랑하는 모습이지만, 이들은 서로의 곁에 영원히 머무르지 않는다. 「그때는 그때 가서」가 보여 주는 것은 끝난 사랑의 차가운 단면이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상대에게 “언제까지 그렇게 살 생각이냐” 묻는 연인과의 이별은 예고된 것처럼 보인다.
이별의 자리에서 홀로
사랑이 끝난 자리에 홀로 남은 이는 헤어짐의 고통을 이겨내고 홀로 서야 한다. 「비눗방울 퐁」은 “나 오늘 비눗방울 되는 약 먹었어.”라는 말로 시작되는 이별의 기록이다.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 했던 연인은 기어코 비눗방울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점차 가벼워지고 희미해지다가 어느 순간 퐁,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 느린 이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헤어짐이 예비된 연인들은 은은하게 감도는 이별의 분위기 속에서 포근하고 청량한 하루를 함께한다. 그렇게 진심을 담아 사랑하는 이를 배웅한 사람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달리는 무릎」은 낯선 존재와의 갑작스러운 만남과 이별을 다룬다. 달리기를 하다가 넘어진 ‘나’의 무릎에 갑작스레 들어앉은 외계인과 ‘나’의 사이는 이상하게 친밀하다. 각자의 자리에서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를 이해하고 있으므로. 헤어진 후에도 만남의 기억을 품고 잘 지낼 것을 알고 있으므로. 지구인과 외계인의 기묘한 만남과 헤어짐처럼, 어떤 인연과 이별은 삶을 꿋꿋하게 헤쳐 나갈 힘이 되어 준다. 이유리의 아프고 명랑한 이별 이야기들이 독자들에게 쥐여 주는 것이다.
■ 추천의 글
“사랑의 진위를 사후적으로 판가름하는 기준은 역설적으로 이별의 고통에 있다. 그토록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이토록의 고통도 아니었을 것. 이 고통과 이 깨달음을 경유하여 이르는 성숙에도 뜻밖의 아름다움이 있다.
이별의 고통에서 회복한 이들은 더 이상 나는 뭐냐고 묻지 않게 된다. 스스로가 그때 무엇이었고 지금은 무엇인지를 정의할 수 있게 되었거나, 최소한 더는 타인에게 그 정의를 대행시킬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무엇이 어떠한지를 정의하고 사물과 사건에 의의를 부여하는 주체성은 스스로에게 돌아온다. “나도 나지만 너도 너”고(「크로노스」), “나는 여기서, (……) 너는 거기서” 살면 되고, 담금주는 “더럽게 맛있”고(「담금주의 맛」)……. 그리하여 『비눗방울 퐁』의 이별은 급습된 사건, 피치 못할 재난 즉 ‘당하는’ 것에 다름 아닌 동시에, 사랑에 내주었던 나의 모든 감각과 의견들을 ‘나’의 영역으로 되찾아오는 주체성 회복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이별을 견뎌낸 존재는 마침내, 다른 이름으로 저장된다. 큰 줄기는 그대로지만 이전과 같은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 ‘너’를 쓴 문장들을 삭제하고도 다시 완연해진 서사로서의 나를 [SAVE]하는 이야기. 나는 이유리가 서사 속 존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 바로 이것이라 믿는다.”
―박서련(소설가)
크로노스 7
그때는 그때 가서 49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79
담금주의 맛 137
보험과 야쿠르트 175
달리는 무릎 203
비눗방울 퐁 237
퀸크랩 281
작가의 말 315
발문 318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기_박서련(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