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타임스》, 《르몽드》, 《마이니치 신문》 격찬!

67번째 천산갑

원제 第六十七隻穿山甲

천쓰홍 | 옮김 김태성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24년 9월 5일 | ISBN 978-89-374-2806-7

패키지 반양장 · 변형판 140x210 · 492쪽 | 가격 18,000원

책소개

베스트셀러 『귀신들의 땅』

천쓰홍의 최신작!

편집자 리뷰

베스트셀러 『귀신들의 땅』

천쓰홍의 최신작!

 

《뉴욕 타임스》, 《르몽드》, 《마이니치 신문》 격찬!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12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으며, 올해 1월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되어 뜨거운 반응을 얻으며 ‘타이완 문학 붐’을 일으킨 『귀신들의 땅』의 작가 천쓰홍의 최신작 『67번째 천산갑』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전작이 ‘귀신’이라는 민속적 모티프를 통해 한 일가족을 중심으로 타이완의 아픈 현대사를 담아냈다면, 『67번째 천산갑』은 유년 시절에 만나 평생에 걸쳐 우정과 헌신, 상처를 주고받은 한 게이 남성과 헤테로 여성의 관계를 통해 고독과 치유의 다양한 면모를 깊이 있게 탐색한 걸작이다.

 

 

■ 너 없이,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어

우리 같이 천산갑을 보러 가지 않을래?

악의가 가득한 이 시대로부터 함께 도망치자, 함께 잠들자

 

소설 맨 마지막에 가서야 이름이 밝혀지는 이성애자인 ‘그녀’와 동성애자인 ‘그’. 그들은 유년 시절에 한 매트리스 광고의 아역 모델을 뽑는 촬영장에서 처음으로 만난다. 어떤 이유에선지는 알 수 없지만, 둘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서로에게 편안함을 느끼면서 매트리스를 찍는 광고에서 달콤한 잠을 자는 연기를 선보였고, 광고는 큰 성공을 거둔다. 그때부터 둘은 평생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된다.

 

‘그녀’의 아버지는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으며, 어머니는 자신이 스타가 되기를 원했으나 실패하자 딸을 통해 성공과 돈을 얻고자 혈안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손대는 것마다 족족 실패하는 사업가이자 난봉꾼이고, 엄마는 자식인 그에겐 다정하지만 바람난 남편과 하루가 멀다 하고 난폭한 싸움을 벌인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는 희귀 동물인 천산갑을 키워 그 비늘을 약재로 팔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들이 사는 산 위의 집에 수십 마리 천산갑을 들여놓는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이 천산갑들은 오직 어린 아들인 ‘그’에게만 친밀감과 신뢰를 보였고, 산 위의 집에 놀러 왔다가 어린 ‘그’와 천산갑이 어울리는 모습을 목격한 매트리스 광고 감독은 이를 소재로 영화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리하여 ‘그’와 ‘그녀’는 매트리스 광고뿐 아니라 천산갑이 등장하는 이 영화에도 함께 출연하게 된다. 천산갑과 아이들이 출연한 영화는 프랑스 낭트 영화제 초청작으로 선정되고, 어린 ‘그녀’와 ‘그’는 제작진과 함께 함께 낭트로 가기로 한다. 그러나 ‘그’의 엄마와 함께 ‘동물’을 잡으러 갔던 두 아이는 결국 시간을 놓쳐 낭트에 함께 가지 못한다.

 

수십 년의 시간이 흘러 중년이 된 ‘그’는 파리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사랑이었던 동성 연인 J의 죽음이 불러온 크나큰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던 그의 작은 아파트에 불쑥 ‘그녀’가 찾아온다. 두 사람이 어린 시절 출연했던 그 천산갑 영화가 4K로 복원되어 낭트 영화제에서 회고전이 열리게 되었고, 그녀와 그가 영화제에 초청받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간 거물 정치인의 부인이 되어 자식도 여럿 낳았고, 한물간 영화배우이지만 가끔 TV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며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으나, 커다란 문제가 하나 있다. 도무지 제대로 된 잠을 잘 수가 없는 것이다. 영화제를 핑계로 그의 아파트에 쳐들어온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잠동무였던 그와 함께 마침내 깊은 잠에 빠진다. 하지만 그녀가 그를 찾아온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파리에서 낭트로 함께 길을 나서는 두 남녀, 그들에겐 아직 나누지 못한 이야기와 찾아야 할 누군가가 있다.

 

 

■ 말할 수 없는 비밀과 표현 못 할 고통이 이어지는 길

그 끝에서 고개를 돌리자, 그 위에는 천산갑의 발자국이 가득했다

 

한국에 두 번째로 소개되는 천쓰홍의 이 작품은, 작가가 게이로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전면으로 내세운 작품이다. 게이인 주인공 ‘그’를 통해 작가는 성적지향에 대한 보수적 인식이 가득했던 1980년대부터, 동성혼이 합법화된 현재에 이르기까지 성소수자들이 겪는 고난과 비애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또한 전작 『귀신들의 땅』의 주요 테마였던, 여성에게 사회적으로 거세게 강요된 임신, 출산, 양육, 결혼을 둘러싼 가부장적인 압박과 그로 인한 처절한 고통 역시 ‘그녀’를 통해 재현한다. 전작이 수많은 인물의 입을 빌려 다층적이고 다성적인 목소리를 쏟아냈다면, 『67번째 천산갑』은 오직 두 사람, ‘그녀’와 ‘그’의 돌고 도는 몇십 년 인연을 축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미스터리와 감춰진 비밀을 탐색한다.

 

게이인 그와 헤테로인 그녀 사이에 맺어진 강한 인연의 접점은 무엇일까. 헤테로인 그녀가 게이인 그를 짝사랑했다든가 하는 식의 납작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들이 서로를 찾는 마음은 혹독한 상처를 입은 두 사람이 그 아픔을 이해하고 그 고통을 헤아리는 데서 생겨난다. 그가 수많은 남자들과의 스치는 쾌락을 통해 해소할 수밖에 없었던 고통, 그녀가 여성이자 얼굴이 알려진 유명 스타로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남모를 수모와 고통. 또한 이로 인해 두 사람이 서로를 찔러 서로에게 상처입힐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맥락이 엮이고 엮여 비밀의 매듭이 되고, 빙글빙글 도는 나선형 계단이 되고, 독자는 그 비밀을 풀어가며 결국 그들의 선택과 인연(또는 악연)을 이해하게 된다.

 

중화권에는 이런 관계를 가리키는 단어도 실제로 존재한다. ‘게이미(Gay蜜)’라는 이 단어는 헤테로 여성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는 게이 남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게이미’는 보통 여성들끼리 주고받을 법한 잡담을 나누는 게이 친구를 가리키는 가벼운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여자들이 누구에게도 쉽사리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을 공유하고 그 비밀을 지켜 주는 존재, 여자들이 성적 긴장 없이 친교할 수 있는 남자를 말한다. 그 역도 성립하는데, 게이에 대한 이해를 거부하는 헤테로 남성과는 달리 여성들은 게이미인 친구가 겪는 어려움과 상처를 공감한다. 천쓰홍은 실제로 독일 라이프치히 동물원에 ‘타이완에서 온 천산갑’을 보러 갔다가, 한 게이 남성과 힘든 결혼생활을 겪고 있는 헤테로 여성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 역시 학창 시절, 많은 여성 학우들의 ‘게이미’였다는 이야기와 함께.

 

오늘날 타이완 문학계에선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동지(同志) 문학’이라는 말이 존재할 정도로 많은 성소수자 작가들이 많은 지지를 받으며 활약하고 있고, 천쓰홍은 그 대표 주자라 할 수 있다. 타이완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동성혼이 입법화된, 성소수자 인권에서는 선진국인 국가가 되었지만, 여러 동지 문학에 담겨진 이야기들은 아직도 많은 억압과 고통의 흔적을 생생하게 전한다. ‘게이미’들의 지지자이자 친구인 여성들의 인권 개선에 대한 목소리 또한 여전히 드높아서, 여성 인권과 성소수자 인권을 개선하고자 하는 이들이 함께 힘을 합쳐 문단에서, 사회와 정치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귀신들의 땅』이 황량하고 외딴 타이완 시골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의 괴이하면서도 친근한 분위기를 담아냈다면, 『67번째 천산갑』은 가을이 찾아오는 파리에서 시작해 낭트 외곽에서 끝난다. 소설은 온통 길 위에서의 이야기다. 떠나는 사람이 있고, 남겨지고 버림받아 상처받는 사람이 있으며, 누군가를 찾아 길을 나서는 사람, 그리고 그의 곁을 동행하는 이가 있다. 옛 인연에서 새로운 관계가 생겨나고, 스치듯 던진 말 한마디와 짧은 단서에서 또 다른 여행의 길이 이어진다.

 

『귀신들의 땅』이 지극히 문학적이면서도 한 편의 걸작 미스터리 같은 장치를 갖췄듯이, 『67번째 천산갑』 역시 인물의 정서와 기억을 통해 시간과 공간이 빠르고 급격하게 전환되면서, 마치 정교한 태엽장치처럼 착착 퍼즐을 맞춰가며 끝을 향해 달린다. 『귀신들의 땅』이 그랬듯, 『67번째 천산갑』 역시 끝까지 다 읽고 나서 다시 앞장을 들추게 만드는 강력한 구성의 힘을 발휘하는 작품이다. 빼어난 이야기 솜씨와 눈물과 폭소를 동시에 부르는 문장력, 가슴 먹먹한 감동 역시 여전하다. 천쓰홍의 작품이 타이완을 넘어 전 세계에 읽히고 찬사를 부르는 이유는, 예측 불가능한 구성력을 발휘하여 독자를 끌어당기는 동시에 보편적인 재미와 메시지를 감동적으로 결합하는 그 재능에 있을 것이다.

 

 

 

■ 작가의 말

 

베를린의 친한 친구 하나가 라이프치히(Leipzig) 동물원에 타이완에서 온 천산갑이 있는 걸 아느냐고 물었다. 녀석들은 타이완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고, 인간과는 다르게 평생 시차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라이프치히 동물원에서 영원히 타이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기차를 타고 산책을 하면서 라이프치히 동물원으로 녀석들을 만나러 갔다.

헬로, 시차를 느끼지 못하는 천산갑들아, 잘 지냈니. 나도 타이완에서 왔어.

 

인사를 마치고 나니 한 쌍의 남녀에게 눈길이 갔다. 연인이나 부부 같진 않았다. 몸의 상호작용에 보이지 않는 장력이 존재했다.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들이 천산갑이 되어 발톱으로 동굴을 파는 모습을 상상하는 이야기였다. 두 남녀의 처지를 알게 되었다. 남자는 게이였고 여자는 유쾌하지 못한 이성 혼인생활에 갇혀 있었다. 어려서 함께 자란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를 남달리 의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엔 비밀이 있지만, 입밖에 내지 않았다. 나는 꼭 소설과 상상으로 이 비밀들을 구성해 내야 했다.

 

이 작품 속의 그녀와 그는 어려서부터 낭트에 가기로 약속했지만, 어른이 되고 늙어서 함께 길을 가면서도 끝내 그곳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인생의 ‘도달하지 못함’ 아닐까._천쓰홍

 

 

■ 옮긴이의 말

 

‘그’는 동지(同志)이자 ‘그녀’의 ‘게이미(Gay蜜)’다. 여성인 ‘그녀’와 게이 친구, 즉 게이미인 ‘그’의 보편적이지 않은 관계가 이 소설의 주요 서사 배경이다. 중화권에서 ‘미(蜜)’는 허물없이 다정한 친구를 의미하는 단어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사람들이 실현하고 향유할 수 있는 가장 달콤한 관계의 상태가 바로 이런 것이다.

이 소설은 서로 뜻이 통하고 마음이 투영되며 서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서로를 가장 잘 도와주는 ‘그녀’와 ‘그’의 관계를 통해 이런 어원적 의미를 증명하고 있다. ‘그녀’와 ‘그’는 연인은 아니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손을 잡고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관계라는 생텍쥐페리의 명제를 완미하게 실증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이 사회가 인정하는 그 잘난 보편적 관계들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인성의 본질에 더 가까울 수 있다는 가능성. 그것이 이 소설이 제시하는 중요한 의의 아닐까._김태성

 

 

■ 본문에서

 

어쩌면 기다림은 그녀가 살아가는 동력이었는지도 모른다. 좀 더 기다리고, 또 다음 사람을 기다리는 것. 기다림은 수동이 아니라 능동의 상태였다. 육체의 전투태세라 할 수 있다. 아주 잘 자기 위해 그녀는 반드시 그를 기다려야 했다. (12쪽)

 

갑자기 한 익숙한 냄새가 공원으로 흘러들어와 떠돌다가 콧구멍 안에 달라붙었다. 곰팡이 냄새에 가까웠다. J는 일어서서 심호흡을 하고 환호했다. 붉은 두 입술에서 쉴 새 없이 페트리쇼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그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자 J가 그의 손바닥에 페트리쇼르라고 써 주었다. 그는 휴대폰에 단어를 입력하면서 몇 번 실패한 후에 결국 정확한 철자를 찾았다. 페트리쇼르였다. 이 단어에 해당하는 중국어를 그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식물이 가뭄을 만났을 때 분비하는 기름방울이 진흙이나 암석에 스며들었다가 비가 건조한 대지를 때리면, 이런 기름이 만들어내는 냄새에 빗물이 섞이는 게 바로 페트리쇼르였다. 사실은 그도 이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었고, 어렸을 때부터 이런 곰팡이 냄새를 두려워했다. (14쪽)

 

그와 그녀는 좁은 침대에 함께 누웠다. 어려서부터 함께 잘 때, 두 사람에겐 신기한 묵계가 있어서 몸을 뒤집거나 이리저리 뒤척이고 웅크리면서도 몸이 전혀 접촉하지 않았다. 그래도 불편하지 않았다. 냄새와 코 고는 소리, 수면 자세 등 모든 게 익숙했다. 그렇다고 아주 편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필경 아주 오래 만나지 못했고, 입밖에 내지 못한 말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리라. (20쪽)

 

그는 어려서부터 잠자리 친구였다. 처음 만나자마자 같이 잤다. 처음 만난 날부터 아주 달콤한 잠을 잤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잠자리 기억이 너무나 감미로워서 머릿속에 거대한 사탕수수밭이 자랐다. 아플 때마다 그걸 잘라 한입 야무지게 씹어 먹었다. 그러면 미소 짓는 입가에 당즙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그가 필요했다. 그가 너무도 그립고 보고 싶었다. 그녀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

가 없었다. 어쨌든 그가 옆에 있어야 적어도 여덟 시간 동안은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 깊이 잠들어 깨지 않았다. (25쪽)

 

말해요. 나는 들을 테니까. 그의 입은 깊은 바다였다. 대답을 건지는 건 물고기를 잡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하지만 그 바다는 상대의 모든 말을 받아들였다. 말없이 넉넉하게 전부 다. 그리고 상대의 모든 비밀을 지켜주었다. (34쪽)

 

지난번 여행에서는 수많은 명품을 샀다. 남편은 그걸 보고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걸 다 쓸 생각이야?”

쓴다고? 쓴다는 게 뭔가? 푸른 꽃양배추 두 개랑 오골계 한 마리를 여기 넣으면 이른바 실용적인 사용법인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소설이나 공쿠르 수상작 문학 전집을 넣고 다니면 이것들을 ‘쓰는’ 것인가? 그녀는 이 명품들을 전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가져가서 약간 과장된 부러움을 끌어낼 작정이었다. 그녀는 다들 진심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그녀 자신도 진심을 내놓진 않을 것이다. 진심은 위험하고 깨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들은 촬영장의 허위처럼 서로 친절하게 호응할 뿐이다. (43쪽)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시인은 무슨 얼어 죽을. 나가 죽으라고 해.

대학 1학년의 밤에 돌아다닐 때 함께 있었던 건 의과 남학생이었다. 그는 시를 쓴다고, 자기가 시 동아리의 회장이라고 했다. 의사 가문 배경은 볼 필요도 없이, 돈이 아주 많은 집인 건 분명했다. 그렇다고 모리배의 속된 기질을 가진 애는 아니었다. 그는 나중에 의사이자 시인이 될 작정이었다. 두 손으로는 의술로 사람들을 구하고 동시에 시를 써서 노벨문학상을 받는 게 꿈이었다.

“나중에 노벨문학상 받으러 나랑 같이 오슬로에 가자. 자, 약속.”

“오슬로? 그건 평화상 아니야? 문학상은 스톡…….”

그녀는 자신의 말을 삼켜 버렸다. 의사 시인의 두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그녀는 아주 일찍 알아차렸다. 의사 시인은 남에게 지적받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152쪽)

 

남자아이의 품안에 있던 천산갑은 아이와 무척이나 친밀한 게 분명했다.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남자아이가 천산갑을 진흙탕에 놔 주었다. 천산갑은 진흙에 닿자마자 몸을 쭉 펴고 앞발로 흙을 파면서 코로 뭔가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몸 전체가 진흙 속에 들어가 꿈틀댔다. 뾰족한 꼬리가 더 많은 진흙을 갈아올렸다. 몸의 모든 비늘에 전부 진흙이 묻었다. 남자아이는 웃으면서 덩달아 진흙 속으로 들어갔다. 달빛이 나뭇가지를 들어 올려 진흙 속의 남자아이와 천산갑을 비춰 주었다. 감독도 웃었다. 감독은 처음으로 달빛이 인공 조명보다 밝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아이와 천산갑은 진흙탕 속에서 신이 나서 움직였다. 빗소리가 있고 지진이 있었다. 해일과 새 울음, 표범의 포효도 있었다. 웃음이 언어를 대신했다. 가장 혼탁하면서 가장 순정한 언어였다. (169쪽)

 

장하이타오와 결혼한 뒤에 시어머니 댁에 설을 쇠러 갔다. 남편이 쓰던 방에 들어서자마자 천산갑이 보였다. 남편은 이것이 신혼인 아내를 기쁘게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방이 귀신 붙은 방처럼 느껴졌다. 벽에는 그녀가 어렸을 때 찍었던 매트리스 광고 포스터가 잔뜩 붙어 있었다. 가장 큰 것은 영화 포스터였다. 침대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녀와 그가 천산갑을 안은 채 잠들어 있고, 옆에는 잠들지 못한 수많은 천산갑들이 꿈틀대고 있었다.

“내가 세어 봤어. 이 포스터에 다 합쳐서 천산갑이 예순여섯 마리 있더라고.”

예순여섯 마리라고? 그녀는 세어 보지 않았다. (202~203쪽)

 

 

주인아줌마에게 작별인사를 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던 날, 파인애플 밭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농사꾼들이 고함을 치며 뛰쳐나왔다. 두 사람도 덩달아 파인애플 밭으로 쫓아갔다. 인근 군사 기지의 낙하산 훈련 중에 낙하산 하나가 파인애플 밭에 떨어졌다

파인애플은 엽관(葉冠)이 딱딱했고, 낙하산병의 엉덩이가 하늘에서 내려오다가 파인애플을 먹어버린 것이다. 온몸이 파인애플 가시투성이가 된 병사는 밭에서 처량하게 울부짖었다.

“큰일났네. 낙하산이 찢어지면 처벌 받아서 휴가를 못 나가는데.”

그녀는 슬피 우는 낙하산병을 보고 있었다. 파인애플 밭의 낙하산병은 한 폭의 아름다운 추상화 같았다. (221~222쪽)

 

그녀가 마지막으로 화를 낸 게 언제였더라.

정확히 특정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화를 내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화를 내려면 진심이 필요했다. 그녀는 자신이 진심이 아니고 성실하지 못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진심을 원하지 않았다. 진심은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분노하기 위해선 온몸의 근육을 다 동원해야 하고, 감정이 격앙되면 자칫 진심의 말이 튀어나오게 된다.

(237쪽)

 

두 사람은 똥차를 몰고 타이베이를 돌아다녔다. 도시는 불야성이었다. 그녀는 먹고 싶은 걸 다 먹었다. 심지어 저간탕까지. 한밤중에 보혈을 위한 임무를 마친 두 사람은 그의 거처로 돌아와 계속 잤다. 자기 직전, 머릿속에 맑고 붉은 강줄기가 나타나면서 장이판의 얼굴이 흐려져 갔다. 그는 그녀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는 핏자국으로 오염된 그녀의 속옷을 욕실로 가져갔다. 처음에는 잘 몰라서 끓는 물로 빨았다. 핏자국이 응고되어 잘 지워지지 않았다. 다시 냉수에 잠시 담가놓았다가 칫솔에 분말 세제를 묻혀 천천히 문질렀다. 그제야 속옷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핏자국들이 지워졌다. (248쪽)

 

의사가 말했다. 부인, 아프면 소리를 지르셔도 돼요. 그래야 우리가 부인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녀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녀에겐 평생 어떤 고통을 만나도 다 참아 내는 방법이 있었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지 않은 것이다. 그가 옆에 있을 때만 그녀는 어떤 방식으로든 소리를 냈다. 어쩌다 그를 만나면 그녀는 목소리에 커다란 천막을 세웠다. 사자후와 곰 울음. 호랑이의 포효, 말 울음, 어릿광대가 풍선을 터뜨리는 소리, 아이들의 폭소, 대포 같은 관중의 환호와 박수, 곡마단의 날카로운 비명의 축제를 토해 냈다. (327쪽)

 

목차

1부 산책

1. 자다 11

2. 물구나무서기 40

3. 새점 68

4. 산을 만드는 사람 98

5. 킥보드 131

6. 숲 162

7. 나무가 없다 196

 

2부 길에 오르다

1. 발라드 227

2. 빵 260

3. 농어 291

4. 수세미 325

5. 배의 잔해 361

6. 바퀴벌레 396

7. 나사 429

 

3부 낭트

1. 공사장 465

2. 포스터 473

 

작가의 말 481

옮긴이의 말 487

작가 소개

천쓰홍

타이완 소설가이자 영화배우, 번역가. 현재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다. 1976년 타이완 융징향(永靖鄕)에서 한 농가의 아홉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푸런(輔仁) 대학 영문과와 국립 타이완대학 연극학과를 졸업했다.

독자와 평론가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현재 타이완 문단의 중심에 떠오른 작가로, 임영상(林榮三) 단편소설상과 구거(九歌) 출판사 연도소설상을 휩쓸었다. 그리고 『귀신들의 땅』으로 타이완 최고의 양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금장상(金鼎獎) 문학부문상과 금전상(金典賞) 연도백만대상을 수상했다. 산문집 『반역의 베를린』 『베를린은 계속 반역중이다』 『아홉 번째 몸』과 소설 『손톱에 꽃이 피는 세대』 『영화귀도(營火鬼道)』 『태도』 『변신의 플로리다』 『알러지를 제거하는 세 가지 방법』 등을 출간했다. 『귀신들의 땅』은 12개 언어로 출간되었고, 《뉴욕타임스》 《라이브러리 저널》 《르몽드》 《마이니치신문》 등에서 격찬받았다.

김태성 옮김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호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겸임교수이며 중국학 연구공동체인 한성문화연구소 대표이자 계간 《시평》 기획위원이다.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대학원과 한국외국어대학교, 동덕여자대학교 등에서도 강의하고 있다. 옮긴 책 및 지은 책으로 『중국사 뒷 이야기』, 『양자강을 가로질러 중국을 보다』, 『중국의 문화지리를 읽는다』 등 5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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