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문학 선집 4 : 세대교체와 저자성 투쟁 ― 1960년대
시리즈 한국 여성문학 선집 4 | 분야 한국 문학
한국 근현대 여성문학의 계보를 이해하는 최초의 기준!
민음사 한국 여성문학 선집(전 7권)
■ 4권 세대교체와 저자성 투쟁 1960년대
혁명의 열기 속에서 점차 또렷해지는 ‘자율적 개인’에 대한 자각과 욕망
1960년대는 4·19혁명으로 ‘시민’이 등장하면서 공론장의 지각 변동이 이루어진 때이다. 한국문학은 서구 시민사회의 욕망과 관념이 투영된 공공적 가치로서 그 위상을 갖게 되었다. 문학은 더 이상 권력이 아니라 시민의 목소리를 대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주체로 여겨진 ‘시민’은 ‘모든 인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신진 여성 작가들은 4·19혁명에 의해 발견한 자율적 개인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가부장제의 여성성 규범을 내파하는 여성 성장을 도모하고, 냉전 권력의 금기를 깨는 불온한 기억과 관찰의 주체를 자임하며 자기 안의 퀴어한 여성에 의지해 가부장제에 균열을 내고자 했다. 사랑을 포기하는 대신에 개인이고자 하는 여성, 상실감과 그리움으로 냉전 권력의 토대를 침식하는 이방인, 사회질서에 순응하는 척하지만 광기의 힘을 빌려 반역을 도모하는 여성, 작가로 인정받고자 하는 여성 등은 1960년대 여성문학사의 문제적 주인공들이었다.
한국 근현대 여성문학의 계보를 이해하는 최초의 기준!
민음사 한국 여성문학 선집
『한국 여성문학 선집』(전 7권)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을 엮은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은 여성주의와 여성문학을 연구해 온 학자들이 한국 근현대 여성문학사 서술을 목표로 2012년 결성한 모임으로,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그 첫 번째 프로젝트이자 성과물이다.
이 프로젝트는 “왜 우리에게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 같은 전복적인 여성문학사, 『노튼 여성문학 앤솔러지』 같은 여성문학 선집이 없는가?”라는 한 가지 명확한 의문과 강렬한 열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성문학사 서술은 여성주의 운동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진 문학사 탈구축 작업의 일환이기도 하다. 문학사 탈구축 작업은 세계대전 이후 파시즘적 잔재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문학사에 깃든 국민·국가, 남성·엘리트, 문학중심주의 등을 걷어내고 여성과 소수자 문학을 문학사에 반영하자는 움직임이었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1990년대 이후 한국에도 문학사 탈구축 작업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여성문학사 서술은 시도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유는 명확하다. 남성 중심의 문학사 서술이 굳건하게 형성되어 오는 동안, 여성문학사는 서술을 시작할 텍스트 선별조차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성문학은 그 전통을 이어 왔음에도 역사적 계보와 문화적 가치를 온전히 인정받지 못했다. 오랜 역사 동안 여성 작가의 ‘저자성’과 여성문학의 ‘문학성’은 의심받았으며, 주류 문학사에서 배제되거나 주변화되어 왔다. 오늘 등장한 『한국 여성문학 선집』이 한국 최초의 ‘여성문학사’이자 ‘새로운 문학사’ 서술의 출발점이 되는 이유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그동안 문학사에 없던 여성의 기준과 관점으로 근현대 한국 여성문학의 계보를 집대성하고, 제도 문학 중심의 구분에서 벗어나 장르 제한 없이 여성 지식 생산과 글쓰기 실천을 아카이빙한 최초의 작업이다.
‘최초’는 ‘다음’을 약속한다.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은 『한국 여성문학 선집』 이후 본격문학과 국민문학을 넘어 대중문학과 퀴어문학, 디아스포라문학을 포괄하고 해외 학회와 협업한 다양한 선집을 후속 과제로 남겨 두었음을 밝히며, 시대마다 문학 공동체마다 다시, 그리고 새롭게 쓰일 새로운 문학사의 탄생을 예고한다.
■ 최초의 ‘여성문학사’이자 ‘새로운 문학사’
문학사는 가장 실용적이고 정치적인 문학의 영역이다.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고 개인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문학 교육의 주요한 방법론으로 ‘문학사 교육’이 위치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바로 그 이유로 과거 국가 권력은 문학사를 ‘민족’과 ‘시민’을 양성하는 첫 번째 도구로 삼았으며, 또한 같은 이유로 문학사는 민주화 이후 가장 먼저 심판대에 오르게 되었다. 1980년대 서구로부터 시작해 2000년대 한국 사회에도 민족과 이념 중심의 ‘남성 중심의 문학사’를 해체하고 새로 쓰는 ‘문학사 탈구축’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그 성과는 미약했다. 새로운 문학사 서술 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문학사는 문학 연구와 교육 모두에서 ‘죽은 지식’으로 외면당해 왔다. 그 역사 끝에 『한국 여성문학 선집』이 등장했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그동안 문학사를 떠받친 문학, 역사, 학문을 둘러싼 오랜 기준들을 오늘날의 관점으로 의심하고 새로이 들여다보며 완성한 ‘최초의 여성문학사’이자 ‘새로운 문학사’ 서술의 시작이다.
■ 시대가 만들고, 시대를 만든 작품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최초’라는 단어가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질적인 ‘원칙’으로 작용한 책이다. ‘여성문학의 진일보를 이룬 작품을 집대성한다.’는 목적과 학술적·역사적 근거와 의미를 가진 작품을 장르 구분 없이 발굴하고 소개한다는 대원칙 아래, 책에 대한 다른 원칙들이 세워졌다. 작품뿐 아니라 ‘학술’과 ‘역사’까지도 여성적 관점으로 다시 보고, 작품과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의 공기까지도 충실히 담을 것이라는 규칙들이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근대 개화기 조선부터 1990년대 민주화 이후 한국까지의 시대를 역사적 전환점으로 구분하고, 시대마다 독자적인 개성과 전환을 이룬 여성문학 작가와 작품을 선별해 담았다. 시, 소설, 산문, 희곡뿐 아니라 잡지 창간사, 선언문, 편지, 일기, 노동 수기 등 제도화된 문학 형식 밖에 있다는 이유로 문학사에서 다뤄지지 못했던 다양하고 자유로운 ‘여성 글쓰기’를 총망라했다.
■ 한국 여성해방 100년의 기록
기존 문학사에서는 나혜석의 「경희」가 《여자계》에 발표된 1918년을 여성문학의 원류로 보았다면,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그보다 20년 앞선 1898년 「여학교설시통문」을 ‘여성 글쓰기’의 원류로 본다. 이 글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받고 일할 권리가 있고 이를 위한 학교를 설립하자고 주장하는 내용으로, 이름을 밝히지 않은 두 여성이 신문에 투고해 발표한 글이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이 글을 “근대 매체인 신문을 통해 공적 담론인 ‘선언문’의 형식으로 페미니스트 집합 의식을 발표한 최초의 글”(1권, 시대 개관)이라 평가하며 ‘여성 글쓰기’의 원류로 짚는다. 「여학교설시통문」을 발표한 이듬해 이 글의 저자들이 한국 최초의 여학교를 설립하고, 그로부터 20년 후 한국 여성문학의 원류인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이 동시에 등장했다는 사실은 한국 여성문학이 만들어 온 여성해방의 방향성과 방식을 명확하게 보여 준다.
여성의 글쓰기와 삶은 앞선 여성의 글을 읽고 다음 여성의 삶을 상상하는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공명하고 움직이며 이루어졌다. 시대마다 형태를 달리하며 여성에게 가해진 억압과 그에 따라 순응하고 저항하며 만들어간 여성의 삶, 그리고 그 속에서 시대를 뛰어넘어 고민하고 열망한 ‘자유’, 여성해방의 과정을 『한국 여성문학 선집』을 통해 고스란히 만날 수 있다.
■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문학사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문학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 없이도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백과사전식 구성과 글로 만들어졌다. ‘시대 개관’은 각 권을 여는 글로, 다루는 작품과 시대 전반을 설명하며 사회·정치·문화적 맥락에서 작품과 작가를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끄는 글이다. ‘작가 소개’ 글은 작가의 생애와 작품, 문학사적 성취와 의미를 보여 주는 글로, 해당 작가를 연구해 온 연구자를 통해 방대한 자료와 엄정한 사실 검증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모든 작품은 초간본 원문을 우선해 수록했다. 이 선집이 지닌 ‘최초’의 의미와 자료적·교육적 가치를 고려해 세운 기준이다. 장편소설은 작품 소개와 주요 장면을 발췌해 수록했다. 현재까지도 널리 읽히는 1990년대 소설과 시를 포함해, 쉽게 구할 수 없었던 1950~1970년대 작품까지 여성문학사의 주요 작품들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 본문에서
소재가 신변에서 왔다고 하여 아주 협소한 뜻의 사소설이라 한다면 나는 저항을 느낍니다.
자기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지 않았던 작가는 없을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모방이 아닌 바에야 작가는 어떤 형식이나 방법으로든 작가의 느낌이란 끊임없이 작품 속에 투영되는 거니까.
― 박경리, 산문 「사소설이의」에서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혼령을 갖게 하소서
― 김남조, 시 「겨울 바다」에서
나는 새삼스레 무엇인가 슬펐다. 아까만 해도 적십자 간호원을 지원할 듯이 흥분했던 내가 아닌가. 나는 내가 아니, 조선이라는 식민지의 한 소녀로 태어난 나의 환경이 운명적으로 너무나도 불순하다는 것을 비로소 느끼게 된 것이다. 그것은, 처음 멘스가 있던 날의 <여자>에 대한 증오라 할까, 경악이라 할까, 아뭏든 무엇엔가 몸부림쳐 억울하다고 항의하고만 싶던 그 심정과도 같다고나 할까.
― 박순녀, 소설 「아이 러브 유」에서
『B국민학교 삼 학년 2반에서 오늘 데모가 있었지?』
수첩의 사나이는 물었다. 아홉 살의 어린이를 놓고 순 직업적일 수는 없겠으나 그러나 그것은 사회봉사 관념으로 굳어진 압력 조의 목소리였다.
『네, 있었어요.』
『왜 데모했지?』
『우리 선생님 도루 오시라구요.』
― 박순녀, 소설 「어떤 파리」에서
박수 소리, 휘파람 소리, 감동과 야유가 뒤섞인 함성 — . 나는 취기로 가누기 어려운 상체를 의자에 의지하며 휘 장내를 살폈다. 모두가 외국인이다. 그들은 제각기 한 사람씩의 한국 여자를 끼고 앉아 있다. (…) 가난한 한국을 도우려 온 그들의 환락, 이 환락의 한 조각에 생명의 끄나풀로 매달린 무수한 인간도 아닌 미물들…… 에이 집어치워라, 나는 머리를 흔들며 얼굴에서 손을 뗐다.
― 이정호, 소설 「잔양」에서
남편의 사랑을 믿으라는 남편의 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요는 남편의 사랑을 믿지 않게 되었다.
믿음을 잃어 가는 정요는 갈증 난 수조(囚鳥)의 홰치는 환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정요는 남편을 떠나갈 채비를 갖춰야겠다는 강박의식 속에서 살았다.
남편은 밤마다 자신의 알맹이는 딴 여자에게 주어 버리고, 허깨비가 되어 정요에게 돌아오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 구혜영, 소설 「은 빛깔의 작은 새」에서
누구에게나 그렇듯 나도 사는 것이 신비했고 재미있었다. 공부도, 책 읽는 것도…… 모든 것이.
여학교에 들어오면서 세계는 조금씩 좁아져 갔다. 시야가 한계를 긋기 시작했다. 이유 없는 모순감과 고뇌가 싹텄고 무서운 인식욕에 사로잡혔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싶었다. 파우스트처럼.
― 전혜린, 산문 「목마른 계절」에서
「자본만 있으면 우리들의 안목과 아이디어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하는 것이 제일인데.」
(…) 그는 가까운 앞날을 투시한다. 언젠가 사업 부움이 오리라는 것을. 미국과 같이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경제가 정치를 지배하고 영향력을 발휘하리란 것을. 이곳에서 아직 권력이 경제계를 지배하고 장악하는 것은 정치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후진성에 있다는 것을.
― 손장순, 장편소설 「한국인」에서
「저 애들은 마치 개 같아. 개지, 뭐 다를 게 있어?」
장 선생은 열심히 그들을 노려다보았다.
「차라리 인간이 개처럼 살 수 있다면 낫지 않을까요? (…) 저는 요즘 느껴요. 숨김없이 솔직한 인간의 어떤 행위에도, 그것이 비밀히 행해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나쁠 것이 없다고요.」
「그건 역설이야. 역설이지. 서양이란 곳은 한국 여자가 올 데는 못 돼. 김 양도 변해 가는 것 같군.」
그렇지는 않다. 무조건 저들의 행위를 닮겠다는 건 아니다. 적어도 나는 솔직하고 싶다. 솔직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싶다.
― 박시정, 소설 「날개 소리」에서
■ 차례
책머리에 4
시대 개관
여성문학의 세대교체와 성숙 16
이영도 38
진달래—다시 4·19 날에 40
박경리 42
쌍두아 44
사소설이의 83
김남조 89
겨울 바다 91
박순녀 93
아이 러브 유 95
어떤 파리 123
이정호 154
잔양 157
구혜영 179
은 빛깔의 작은 새 181
함혜련 201
내 음악이 멎을 때까지 203
강인숙 205
여류문학의 새 지표 207
김후란 216
거울 속 에뜨랑제 218
전혜린 220
목마른 계절—이십 대와 삼십 대의 중간 지점에서 222
손장순 231
한국인 233
정연희 245
정점 247
강계순 280
꽃병 1 282
허영자 284
자수 286
녹음 288
박시정 290
날개 소리 292
한국여류문학인회 320
창간사 322
여류문학 50년을 회고한다 325
서문 346
엮은이 소개 348
집필에 참여한 연구자들 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