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진전 있음

이서하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23년 8월 18일 | ISBN 978-89-374-0935-6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24x210 · 164쪽 | 가격 12,000원

책소개

물처럼 쏟아지는 위험을 얼리는 영점의 쓰기
얼음이 된 위험 위를 걸어가는
묵직한 가벼움, 진전 있는 발걸음

편집자 리뷰

2016년 《한국경제》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인 이서하의 두 번째 시집 『조금 진전 있음』이 민음의 시 315번으로 출간되었다. 첫 번째 시집 『진짜 같은 마음』에서 무심히 걷 던 속도를 늦추고 멈춰 서서 세상의 구석구석을 살핀 뒤 ‘진짜’와 ‘진짜 같은 것’의 차이를 묻던 시인 은, 두 번째 시집 『조금 진전 있음』에서 멈췄던 발걸음을 새로이 떼고, 옮기며, 나아간다. 시집 『조금 진전 있음』은 시인이 내딛는 그 조심스럽고도 거침없는 보폭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처음 시집을 열 어 차례를 펼치면 우리는 시인이 수집한 ‘가장 위험한’ 것들의 목록과 마주하게 된다. 이것은 시인이 탐색한 석연치 않은 슬픔의 집합이기도 하다. 두 번째 시집을 묶으며 시인은 아마도 세상을 웅덩이 로 인식한 것처럼 보인다. 웅덩이의 특징은 움푹 파였다는 것, 그리고 물이 고여 있다는 것이다. 이 작은 패임은 늪보다는 작아 빠져나오기 더 쉽지만 애써 조심하게 되지 않아 언제든 빠지기도 쉽다. 슬픔이 물처럼 고인 웅덩이가 도사린 삶에서, 고여 있지 않고 지나가기 위해 시인이 택한 방식은 문 장을 찢고 잇고 덧대고 제작하는 것. 우리는 시인의 문장을 다리삼아 슬픔의 웅덩이를 건널 수 있 다. 이때 웅덩이에 고인 것들은 이서하의 문장 사이사이로 비칠 뿐이라서, 우리는 슬퍼도 슬프지 않 은 채로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다.


 

■급속 냉동 위험 취급 주의
이서하가 ‘위험하다’고 지목하거나 분류하는 것들은 물과 가까운 성질을 띠는 것처럼 보인다. 시집 의 도처에는 시인이 감각하는 위험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데, 그것은 삽시간에 불어나는 물, 갑 자기 쏟아져 내리는 비, 그리하여 예기치 못하게 물에 빠지고 젖게 되는 우리의 몸과 옷과 집이다. 난데없이 물을 뒤집어쓰게 된 시인은 비명을 지르거나 발을 구르는 대신 이 상태를 어떻게 규정하 고 수집할지 고민한다. 위험의 종과 수, 생태와 번식을 관찰하고 연구하기 위해 그 표본을 수집하는 위험학자가 된 듯, 우리를 적시는 위험을 담아 보려 애쓴다. 위험을 담기 위한 시인의 도구는 이상하 고 고유하다. “엉성하게 엮인 매듭”(「가장 위험한 심심하지 않은」)으로 이루어진 주머니와 “옛것에 각 별한” “삽”(「가장 위험한 제자리는 어디에」), “어중간”한 “실내화 가방”(「가장 위험한 한때」)과 “무엇이든 올려놓을 수 있는” “숟가락”(「가장 위험한 뜬구름」). 이것은 시인의 무기이자 장기, 흐르고 쏟아지는 위험을 구체적인 모양으로 단단하게 얼리는 시의 언어다. 이서하가 급속 냉동한 위험은 이제 우리의 손안으로 들어온다. 그것을 쥘 수 있고 집어 들어 주머니에 담을 수 있다. 오래 들여다볼 수 있다. 뜬구름 잡듯 슬퍼하지 않고 건조하고 딱딱한 채로 슬퍼할 수 있다, 이서하는 자신의 소중한 위험 채 집통을 우리 앞으로 밀어준다. 우리 역시 위험을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미리 아는 듯이.


 

■덧쓰기, 이어 쓰기, 새로 쓰기
시인이 그렇듯, 우리가 가장 자주 맞는 위험-물벼락은 ‘상실’일 것이다. 가장 자주 헛디뎌 빠지는 슬 픔-웅덩이에도 역시 살아가며 잃을 수밖에 없는 갑작스러운 이별과 상실 들이 찰랑이고 있다. 위험 이 내릴까 하늘을 두리번거리며, 슬픔에 빠질까 땅을 샅샅이 보며 걷는 이 느린 걸음의 나날에, ‘조 금 진전 있음’을 알려주는 유의미한 깨달음은 “고독을 면할 길이 없다”(「가장 위험한 녹았다 언 아이스크림」)는 사실이다. 상실은 보이는 것보다 깊은 구덩이다. 얕은 웅덩이인 줄 알고 금세 젖은 발을 털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은 구덩이가 아닌 구멍이어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상실이라 는 구멍을 메우고, 바닥을 만들기 위해 시인은 책을 빌린다. 책의 문장, 책의 두께, 책의 시간과 파편 을 쌓아 상실한 자리의 디딜 곳을 마련한다. 그러다가 남이 쓴 책이 여의치 않으면 스스로 책을 만 들어 낸다. 『파란 하늘』과 『검은색 하늘』(「가장 위험한 전집」, 78쪽)이 그것이다. 상실의 구덩이에서 올려다볼 수 있는 상상의 하늘을 쓰기.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시인은 알고 있다. 독서와 인용은 구덩이로부터 올라오게 하는 사다리가 되고, 전체의 구멍 을 메우는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되고, 상실한 현실을 덧쓰는 새로운 현실이 된다. 시인은 말한다. “이 상실에 대한 경험으로 그에게 새로운 구석 하나를 만들 수 있는 구실이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기괴한가.”(가장 위험한 감상문, 46쪽)


 

■ 본문에서

종이에 싸인
청포도가 달다
더 단 것은
종이에 없다

아빠가 없네
건너뛰었다
-「가장 위험한 건너뛰기」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물
몸으로부터의
아주 작은 도망

굉장히 어른이라는 생각에 그가 헐벗은 것은 나이였고
벗겨 내지 못한 현실은 겨우 남은 것들의 그루터기, 진흙투성이, 흙무더기가 된다, 처음이 시작된다

이 말은 덧붙이기
복사 붙여 넣기
-「가장 위험한 플레이어」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은 물을 나르는 일
밤새 기른 것은 기댈 게 없어서 한참 흐릅니다
창에게 세상은 비가 내린 것 마냥 쏟아지는 것
그럴 때마다 창은 물고기처럼 목을 가누어
꺼지지 않는 건물의 불빛을 바라봅니다
-「가장 위험한 몰수가 없었다면」에서

어쩌다가, 어쩌다가
갔어 너무 갑자기 갔어

조문 온 친구가 그늘진 구석을
펼치듯 웃으며 대답한다

언제 가도 갑자기야
-「가장 위험한 다사다난」에서


 

■추천의 말
이서하가 우리에게 내어 놓은 “가장 위험한” 시들을 앞에 두면 이미 여기에 노출된 것만으로도, 나 지금 상당히 (누군가에게 혹은 나에게) 위험해진 것 아닌가, 나 이 위험들의 일부가 된 것 아닌가…… 싶어진다. 위험의 가장 멋진 점은 시간과 마찬가지로, 돌이킬 수 없다는 데 있다. 위험의 가장 재미있는 점은 ‘내’가 위험을 이루는 통제 불가능한 구성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위험을 감지함으로써, 위험을 도리어 위험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달까. 최대한 위험을 피하고 싶은 사람들, 위험을 알아차렸을 땐 이미 늦었다는 생각에 빠진 사람들, 위험을 돌파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특히 이서하를 권하고싶다. 도망도 돌진도 거부함. 위험에 닿고 싶은 사람들이 여기 모임. _김복희(시인)

목차

자서(自序)

가장 위험한 횡으로 9
가장 위험한 식물학자 11
가장 위험한 우리는 그로 인해 14
가장 위험한 모자 15
가장 위험한 건너뛰기 18
가장 위험한 플레이어 22
가장 위험한 심심하지 않은 25
가장 위험한 제자리는 어디에? 28
가장 위험한 나는 32
가장 위험한 한때 33
가장 위험한 세계관 36
가장 위험한 예전 교회 38
가장 위험한 뜬구름 40
가장 위험한 스티로폼을 훔치고 43
가장 위험한 감상문 46
가장 위험한 우정 없는 사랑 51
가장 위험한 겁을 집어먹고 54
가장 위험한 녹았다 언 아이스크림 57
가장 위험한 가위 교차하기 60
가장 위험한 기타 등등 63
가장 위험한 검은 벽 66
가장 위험한 몰수가 없었다면 69
가장 위험한 우리가 여자다 72
가장 위험한 전집 77
가장 위험한 전집 78
가장 위험한 감상문 81
가장 위험한 것 같다 86
가장 위험한 것인지 87
가장 위험한 창문을 90
가장 위험한 헛되지 않음 92
가장 위험한 회로 95
가장 위험한 종으로 98
가장 위험한 되감기 100
가장 위험한 심사숙고 여러분 101
가장 위험한 로봇이 아닙니다 104
가장 위험한 마른 강에서 107
가장 위험한 감상문 108
가장 위험한 구경꾼 112
가장 위험한 에그스크램블 114
가장 위험한 불행은 굴러가는 공 같아 117
가장 위험한 이봐, 조 120
가장 위험한 낭독회 122
가장 위험한 방식의 역설 125
가장 위험한 죽음 128
가장 위험한 미미한 것 131
가장 위험한 되감기 134
가장 위험한 가방 135
가장 위험한 다사다난 138
가장 위험한 때로는 간단한 것 142

작품 해설–송현지(문학평론가) 143

작가 소개

이서하

1992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2016년 《한국경제》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켬>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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