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오늘도 커다랗게 입을 찢으며 웃고 있습니까

신성희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22년 10월 14일 | ISBN 978-89-374-0923-3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24x210 · 156쪽 | 가격 12,000원

책소개

마침내 몸을 열어 비밀을 흘려보내는 상처,
텅 빈 몸으로 염원하는 재생의 시간

 

그로테스크의 귀환과 진화를 알리는
신성희의 첫 시집

편집자 리뷰

2016년 《현대시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신성희 시인의 첫 시집 『당신은 오늘도 커다랗게 입을 찢으며 웃고 있습니까』가 민음의 시 303번으로 출간되었다. “날카롭게 돌출되는 흉기를 먼저 보여 주는 방식으로 말을 시작하는 시”라고 쓴 김언 시인의 작품 해설처럼, 신성희 시인은 일상의 리듬을 변주하는 대신 일상의 균형을 깨부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기존의 의미와 질서가 무너지며 뚫린 구멍에는 모든 감정이 뒤섞여 들어와 만들어진 혼돈의 색, ‘검정’으로 가득하다. 시인은 그 검정의 구덩이로 들어가, 끔찍하고 기이하게 일그러진 이미지, 피와 불의 붉은색을 조약돌처럼 떨구며 더 깊은 어둠, 그림자조차 없는 시원적 어둠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 길에서 시인이 보여 주는 것은 우리가 오랜 시간 동안 암묵하고 수용해 버린 감정들, 서서히 익숙해지는 방식으로 잃어버린 감정의 원형이다. 슬픔인 줄 몰랐던 슬픔, 공포인 줄 몰랐던 공포. 광기로만 여겨진 그 감정들이 회복되어 우리 앞에 다시 펼쳐진다.


■ 검정의 감정

신성희 시인에게 감정은 색, 이미지, 물질일 뿐만 아니라 몸이다. 솟아 있는 비석을 보며 느끼는 통증은 “파릇파릇”하고, 불타는 방 안에 있는 너는 “빨갛다”. 감출 수 없는 마음은 “벗어 놓았던 내 피부”이자 “뿔”이다. 그중에서도 신성희 시인의 시에서 가장 강력하고 지배적인 색이자 감정으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검정’이다. 신성희 시인에게 ‘검정’은 사건이 은폐되는 어둠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감정이 다른 감정으로 변화하고 변모하며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뒤섞이는 사건 현장 그 자체다.

말할 수 없는 모든 기억과 감정 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검정’이 악몽처럼 끝없이 덮쳐 오는 가운데, 시인은 자신의 목소리를 비명처럼 내지른다. 어둠을 찢고 뛰쳐나오는 개, 타오르는 불, 누군가의 주먹을 맞고 튀어나오는 코피처럼 붉고 뜨거운 시인의 목소리는 이제 막 벌어진 상처처럼 생생하다. 시인은 상처를 치욕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 자체로 이미 ‘몸’이라는 듯 우리 앞에 내민다. 신성희 시인의 시는 이제 하나의 몸이 되어 살아 숨 쉬는 상처가 내뿜는 빛과 열기, 냄새로 우리가 오래도록 침묵한 기억, 억눌러 두었던 감정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 비밀이 되는 사건

『당신은 오늘도 커다랗게 입을 찢으며 웃고 있습니까』의 여성 인물들은 ‘초자연적’이거나 ‘무고한 피해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오랜 세월 우리가 ‘여성’을 이야기와 사건의 변방으로 밀어내며 입혔던 바로 그 역할이다. 시집 전반부에 등장한 여성 인물들이 어두운 밤 발로 피를 끌며 지나가고, 불타는 얼굴로 명령을 내리면서 사건을 촉발하는 마녀나 요괴처럼 초자연적인 존재라면, 후반부의 여성들은 이유 모를 테러를 당하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피해자처럼 보인다. 여성을 도구로 삼아 온 수많은 이야기에서의 화자라면 이 여성들을 대신해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었겠지만, 신성희 시인의 화자는 굳건히 침묵을 지킨다. 이 침묵으로서 신성희 시인은 제안한다. 당사자와 목격자 모두의 침묵으로 텅 비어 버린 공간, 이 ‘공백’을 한번 들여다보자고. 마녀이거나 피해자처럼 보이는 ‘인물’의 정체나 무섭고 흥미로운 ‘사건’의 숨겨진 진실보다, 더 끔찍한 비밀이 바로 여기에 모여들 것이라고. 그곳에 흘러드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불길한 상상과 암시, 그에 따라 이끌려 온 슬픔과 공포의 감정이다. 시인은 이것을 함께 들여다보자고 손짓한다. 여기에 비친 우리는 어떤 얼굴이냐고.

신성희 시인은 삶과 죽음, 욕망과 사랑 등 관념적 가치의 허무를 드러내던 그로테스크의 냉혹한 시선을 ‘자아’로 돌린다. 그 시선을 통해 본 ‘자아’는 깊은 밤 피에 젖은 발을 끌고 가는 ‘저 여자’가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알 수 없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을 넘어, 사실은 ‘저 여자’가 ‘나’일지도 모른다는 자아 분열의 불안과 공포가 팽배한 가운데 감각된다. 보거나 겪고도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자의 혼란스러운 기억, 뒤섞여 요동치는 감정, 스스로를 벌할지 위로할지 결정할 수 없는 유보 상태에 놓인 ‘자아’의 모습은 불안에 젖어 살아가는 우리의 내면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놀랍게도, 분열하고 표류하는 ‘자아’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도록 이끄는 신성희 시인의 시에서 우리는 위로 이상의 치유를 발견한다. 서둘러 봉합하는 대신 상처를 벌려 속내를 들여다보는 방식의 치유. 새로운 피가 차오르도록 상처에 고인 죽은 피를 남김없이 흘려보내는 의식. 신성희 시인의 시를 통해 이 의식을 통과하고 나면, 우리는 보다 명료하고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재생의 시간을 기다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바이칼 호숫가에 늙은 무녀가 산다

어두컴컴한 방,

피에 젖은

말 머리뼈를 만지며

그녀는 밤마다 중얼거린다

 

이곳에선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아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아

―「바이칼의 무녀」에서

언니는 불타는 얼굴로 방 안에 앉아 있습니다

집에 난 불이 얼굴을 태웠습니다

왼쪽 뺨에 모르는 생물을 키웁니다

 

언니는 명령하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산딸기의 계절이에요」에서

바닷물이 빠져나간 모래사장이

너무 아름답고

젖은 녹색 이끼 덩어리들과

드러난 돌들이 조각 같다고 생각하며 서 있는데

여행객 중 누군가가 네게 들려주었지

이곳에서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갔던 수부들

그들 중 익사한 이들이

시신으로 이 해변에 다시 밀려온다고

깊이가 없는 바다는

아무것도 간직하지 못하는 바다는

모래사장에 시신을 도로 토해 놓았다고

마을 사람들은 관을 가지고 와서

이 해변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파도가 오래된 시체들을 깨워 일으킨다

너는 빛이 빠르게 사라져 가는 해변을 걸어간다

―「해변의 기분」에서

그러니까 우리는 아는 것이 없고

알아야 할 것이 없고

알고 싶은 것이 없다

오늘처럼 이가 시린 가을 아침,

나는 하숙집 마당에서 찬물로 세수를 하다가

맞은편 아파트 창문에서 갑자기 떨어져 내리는 사람의 상판때기를 보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봐, 나는 떨어지는 것들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는 길에서

노인이 혼자 중얼거린다

―「당신의 자세」에서

만두의 미덕은

무엇을 집어넣고 만들어도 모른다는 것

당신은 만두소에 당신이 모르는 무엇까지 넣어 보았습니까?

(……)

만두를 먹으며 나는 어른이 되었다

잘게 부서질수록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작아지는 나를 껴안고

작은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주름 속에 나를 집어넣고

입을 꿰맨 채 살아 있지만

당신은 오늘도 커다랗게

입을 찢으며 웃고 있습니까

―「만두와 만두」에서

 

■ 추천의 말

날카롭게 돌출되는 흉기를 먼저 보여 주는 방식으로 말을 시작하는 시.

그것이 신성희 시의 일단을 이룬다.

찌르거나 베거나 때리거나 물어뜯거나 태워 버리는 용도가 전제된 사물들 사이에서도 남다른 비중을 차지하는 사물이 있으니, 바로 ‘뿔’이다.

“감출 수 없는 마음”과 “벗어 놓았던 내 피부들”과 “갇혔던 소리들”과 “터져 나오는 울음”이 응어리진 채 솟아오르는 뿔. 여러 색깔의 응어리가 결과적으로 검은색을 향해 간다면 여러 감정의 응어리는 끝내 검고 딱딱한 뿔로 융기한다. 융기하면서 “어디로도 나지 않는 길을” 걸어간다.

흉기와 무기로 점철된 폭력의 현장이 나의 피부에 새겨지면서, 그러한 폭력의 시간이 피부 깊숙이 누적되면서, 역으로 솟아오른 결과물이 어쩌면 뿔이 아닐까.

뿔이 폭력의 기억을 “땔감”으로 삼아 솟아오르는 불과 같은 것이라면, 불타는 현장을 통과해 온 자의 육성은 곧 불의 언어이자 신성희 시의 언어인 것이다.

― 김언(시인) | 해설에서

목차

■ 차례

1부 검은 뿔산

불타는 집 13

검은 뿔산 14

밤은 속삭인다 16

구덩이 18

12:00 20

야광귀 22

빨간 구름 24

부엉이 26

말복 28

유모차 30

거미의 방 32

바이칼의 무녀 33

고양이 거리의 랩소디 34

양배추 35

톱 36

회색차일구름 38

순록 39

자두나무 40

이월에는 이가 아팠다 42

굴착기와 포클레인 43

 

2부 Richmond Park

버찌를 밟는 철 49

산딸기의 계절이에요 50

Richmond Park 52

흰 개를 따라 56

입말의 시간 58

양 60

조도 62

아름다운 불이 64

여름휴가 66

해변의 기분 68

눈 내리는 밤에 70

긴 겨울 동안 우리는 함께 있었지 71

눈사람이 유리창으로 우리를 들여다본다 74

지혜 76

지혜 78

지혜 79

심장 80

페이스북 81

 

3부 그럴 수 있지

당신의 자세 85

여행 88

그럴 수 있지 90

오늘 저녁, 성수동에서 94

검은 코트가 의자에 걸려 있다 97

여름의 뒷모습 100

흑미사 102

이니스프리 103

만두와 만두 106

수학 시간 110

오스티나토 113

양말과 앵무새 116

안드로메다 120

갔다 122

산책의 가능성 124

Portra 400 128

 

작품 해설–김언(시인) 131

작가 소개

신성희

2016년 《현대시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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