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과 수사, 시의 또 다른 이름
그 정체성을 확인하고 상생(相生)과 화합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이화여대 국문과 김현자 교수가 지난 40여 년간 현대시 연구에 투신해 온 자신의 여정을 집대성한 역작이 출간되었다. 김현자 교수는 실증주의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접근이 주류를 이루던 한국 문학 연구의 풍토에서, 텍스트의 심미적 구조와 수사적 장치를 규명하는 내재적 문학 연구 방법을 선구적으로 개척해 온 대표적인 학자로 손꼽힌다. 또한 한국시학회, 기호학회 등 국내 유수한 학회의 회장을 역임하며 여성 연구자의 위상과 평판을 드높였다. 정끝별, 이기성 시인 등 수없이 많은 문인과 교수를 양성한 스승이자 한국 시학계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저자는 평생 동안 시를 읽고 가르치고 공부하며, 시의 생명이 항상 새롭게 부활하기를 꿈꾸면서 시의 길을 따라 걸어왔다.
김현자 교수는 이 책에서 ‘서정’과 ‘어법’이라는 키워드로 개별 시인의 상상력과 세계관을 조명해 보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 시의 원형과 주체성을 탐색하면서 서정의 본질을 통시적으로 고찰한다. 또한 시적 상상력과 비유,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채롭게 펼쳐지는 시의 수사(修辭)에 집중적으로 천착하는 세밀한 분석으로 서정시의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 관계를 조망한다. 이 책에는 저자가 일평생 탐색해 온 서정과 수사의 구조물로서의 시학이라는 학문적 주제가 집약되어 있으며, 서양 시 이론과 소통하면서 한국 시학을 주체적으로 정립하고자 하는 시도가 주목된다. 한국 서정시 전통을 돌아보는 이 책을 통해 우리 시는 비로소 그 정체성을 확인하고, ‘상생(相生)과 화합’이라는 새로운 길을 걸어갈 것이다.
■ ‘따뜻한 소통’과 ‘뜨거운 감동’을 지향해 온 한국의 서정시, 그 본질을 고찰하고 원형과 주체성을 탐색하다
이 책의 저자인 김현자 교수는 현상학적 연구 방법과 구조주의와 기호학을 아우르며, 한국 문학의 근원적 상상력과 미적 구조를 밝히는 독보적인 작업을 계속해 왔다. 그의 연구를 통하여, 메타포, 상상력, 이미지 등 현대시론의 주요 개념이 우리 시문학 연구에 적용되었고, ‘비유’, ‘이미지’, ‘상상력’, ‘반어와 역설’, ‘화자’, ‘미적 거리’, ‘공간’, ‘시간’, ‘자연’, ‘상징어’ 등이 시문학 연구의 중요한 키워드가 될 수 있었으며, 한국 시문학계에서 ‘분석적 연구’라는 새로운 장이 열릴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지난 40여 년간 현대시 연구에 투신해 온 자신의 여정을 집대성한 역작을 출간하였다.
김소월, 한용운, 김영랑, 유치환, 노천명,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서정주, 박용래 등의 시는 한국 시의 전통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바탕이 된다. 이들에게 시간과 공간, 나와 너, 주체와 대상은 단절·분리된 것이 아니라 순환·통합되어 있다. 경계를 넘나드는 다시점(多視點)의 변용을 통해 타자와의 적극적인 소통을 지향하는 공간 의식, 동양적인 순환의 시간관을 바탕으로, 존재의 근원으로 확장해 가는 시간 의식은 한국 시 특유의 독특한 미의식에 의해서 각각 씨줄과 날줄이 되어 한국 시의 전통을 구축해 오고 있다.
한국 시는 이곳과 저곳 사이 또는 상반되는 지향 사이에서의 갈등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이 다양한 관계들을 상생(相生)의 미적 거리에 의해서 이어 낸다. 이러한 심미적 거리 의식은 경계 공간과 분절의 시간을 넘어 나와 타자 사이의 대립성을 완화시켜 나간다. 소월의 작품에서 최근 시인들의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심미적 거리 의식은 한국 시 전통의 주된 지향성을 이루면서, 고요한 공간 속에 비축되어 있는 시간의 흐름까지도 정밀하게 포착해 내는 한국 서정시의 독특한 미학을 수립한다.
이러한 사유 방식은 단절 속에서 화합을, 분리 속에서 통합을 꿈꾸는 에너지로 작용하면서 한국 시의 전통을 확장시킨다. 이것은 서정적 순간의 다양한 변이와 확산에 바탕을 두고 새로운 화해와 열림을 지향하는 구체적 운동 방향이며, 한국 시 전통의 씨실과 날실을 직조하는 원형적 에너지이다. 이 전통의 주된 지향성이야말로 한국 시를 다르면서도 함께 타오르는 연속체로 살아 숨 쉬게 하며, 한국 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해 주는 원동력인 것이다.
이 책의 1부에서 저자는 서정과 어법을 날실과 씨실로 하여 한국의 대표적 서정시인들을 개별적으로 조명한다. 1930년대 비유를 다룬 글로 시작하여 김소월, 한용운의 이미지 변용을 다룬 글에 이르기까지 비유, 상상력, 이미지 변용에 대한 고찰, 그리고 화자와 어법, 비유와 감각, 미적 거리 등의 수사적 장치를 통하여 시인의 상상력과 세계관을 규명한다. 이 장은 자연시의 은유 틀, 은유와 환유의 변주, 극적 구성과 미적 거리, 어법, 감각의 변용, 이미지, 원형의 문제 등을 박목월, 박용래, 서정주, 김소월, 한용운, 노천명 시인을 중심으로 탐구한다.
2부에서는 1부의 시적 화두들을 바탕으로 한국 시의 원형과 주체성의 탐색, 서정의 본질, 시사(詩史)의 흐름 등을 총괄적으로 다룬다. 한국 시사와 여성시사, 인간과 자연, 인간과 사물 사이의 관계, 동일화의 원리, 그리고 서정시의 본질과 범주의 문제를 서정과 시사를 균형 있게 아우르는 관점에서 고찰한다. 저자는 서양의 문학 이론을 적용하면서도 한국 시학의 주체적 정립이라는 지향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 시학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 책머리에
수사는 서정을 담는 아름다운 그릇이며 서정은 수사를 숨 쉬게 하는 공기이고 따뜻한 빛이며 장력이다. 수사와 서정이 함께 어울려, 비로소 시의 생명을 품는 잘 빚어진 항아리가 탄생한다. 수사와 서정은 그래서 시의 또 다른 이름이다.
평생을 시를 읽고 가르치고 공부하며 살아왔다. 나의 옆에는 항상 시를 읽는 학생들이 있었고, 그들과 함께한 계절의 굽이굽이마다 시의 나무는 한층 무성해졌다. 초록의 이파리를 흔들며 일제히 꽃을 틔우는 시의 이미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리듬을 노래하는 시의 운율, 우주의 순환을 지켜보는 시의 상징들, 생과 죽음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시의 역설. 시의 나무 아래에서는 항상 새로운 삶의 진경들이 펼쳐졌다. 깊은 숲이 열리고, 숲은 다시 길고 어두운 터널로 이어졌다. 그리고 언덕 너머에서 천지를 흔드는 폭풍이 밀려오기도 했다.
한 편의 시가 내뿜는 찬란한 불꽃을 따라 참 길고 먼 여행을 했다. 불꽃이 사그라지는 것을 마지막까지 지켜보며 타고 남은 언어의 조각, 이미지의 부스러기, 상징의 흔적까지도 모아 담는 것이 나의 일이다. 시의 씨앗을 담은 언어의 항아리들을 하나씩 쌓다 보니, 아, 이제 뜰이 가득하다. 작은 항아리 안에서 시어들은 다시 휴식하고 대화하면서 부활의 꿈을 꿀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브룩스의 ‘잘 빚어진 항아리’가 그렇듯이, 이 작고 견고한 항아리는 다시 찬란하게 불사조로 비상할 것이다. 그날, 또 어떤 시의 길이 열릴 것인가?
—「책머리에」 중에서
■ 차례
책머리에
1부 수사(修辭)와 어법(語法)
1. 은유와 환유의 변주 – 서정주
2. 한국 자연시의 은유 구조 – 박목월·박용래
3. 극적 구성과 미적 거리 – 김소월
4. 시의 어법과 세계관 – 한용운
5. 시의 화자와 감각의 변용 – 노천명
6. 음성상징과 민족어의 울림 – 김영랑
7. 설화 텍스트의 이미지 변용 – 서정주·김춘수
2부 서정(抒情)과 시사(詩史)
1. 서정의 본질과 변모 양상
2. 한국 시 전통의 계승과 확장
3. 현대 문학과 상상력의 총체성
4. 근대 문화 수용과 서정의 형상화
5. 전후 모더니즘과 서정시의 확장
6. 한국 여성시의 존재 탐구와 언술 구조
7. 한국 현대 여성시사의 새로운 지평
8. 국어국문학 연구의 확장과 연계성 탐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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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