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네카의 ‘위로 3부작’으로 유명한 『철학자의 위로』는 가족의 죽음이나 추방을 견뎌야 하는 이들을 위로하는 서간문이다. 세네카는 고통을 축소하지 않고 직시한다. 그의 문장은 공허한 위로들의 모음이 아니라, 철학적 사유로부터 흘러나온 구체적인 조언들이다.
세네카가 제시하는 슬픔의 극복 방법은 20세기 프로이트가 제시했던 실천에 철학적 근거가 되며, 21세기 뇌과학자가 밝힌 우리의 정신에 대해 이미 철학적으로 성찰한 결과들이다. 『철학자의 위로』는 트라우마와 불안으로 고통 받는 현대인에게 놀라운 세계를 열어줄 것이다.
●고통을 축소하거나 은폐하면 안 된다, 그러나 오랜 고통은 깨부수어라!
슬픔은 “스스로 새로워져 나날이 강해지고, 이제는 그 오래된 시간이 스스로 법칙을 만들어 그만두는 것이 추하다 여겨질 지경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자 세네카는 꽃길만 걸으라는 식의 공허한 위로를 남발하지 않는다. 단순히 ‘달래려고’ 하거나 결코 불행을 ‘축소하려고’ 하지 않는다.
현대의 뇌과학자들은 인간이 오랫동안 어떤 감정에 몰입해 있으면 그 상황에서 벗어난 후에도 (그것이 불쾌한 감정일지라도) 자꾸 그 익숙한 감정으로 돌아가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미 고대 로마에서 세네카는 슬픔도 “불행한 정신의 왜곡된 쾌락인 고통으로 변모한다는” 것을 지적해 낸다. 그래서 “고통으로 스스로를 소진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결국 세네카는 스스로 크는 괴물처럼 오래되어 만성이 된 고통을 향해 이렇게 선언한다.
이제 나는 듣기 좋은 말로도, 부드러운 방식으로도 그처럼 오랜 고통을 공격할 수가 없어요. 깨부수어야 합니다.
―세네카, 『철학자의 위로』에서
세네카는 극한 고통을 이겨내도록 위로하는 방법으로, “상처를 불로 지지고 잘라내는” 것을 시도한다. 더 큰 시련들을 이겨낸 과거들을 회상함으로써, 지금 “상처투성이 몸에 생긴 상처 하나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피부를 찢어 놓았을 뿐 아니라 가슴과 내장까지 파헤친” 고통을 이겨내는 길에 대해, 세네카는 이렇게 말한다.
신병들은 가벼운 부상만 입어도 비명을 지르고 적의 칼보다 의사의 손을 두려워하는 법이지요. 하지만 고참병들이 깊은 상처를 입어도 남의 몸인 양 신음도 내지 않고 피로에 몸을 맡기듯, 어머니도 그처럼 용기 치료에 몸을 맡기셔야 합니다.
―세네카, 『철학자의 위로』에서
“애정과 이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끝없는 고통에 몸을 맡기는 것은 어리석은” 애정이지만, “전혀 아파하지 않는 것도 비인간적인 냉혹함”이다. 인식론자들은 입을 모아 우리 생각이 지성, 감정, 의지 순으로 움직여야 올바르게 판단하게 된다고 말한다. 지식적으로 아픔의 강도와 한계가 어디까지여야 하는지 스스로 근거를 찾을 때, 비로소 우리의 감정이 과도하지 않으면서 애도와 아픔을 통과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철학자의 위로가 필요하다.
이미 잘 알고 있고 여러 번 물리친 적 있는 적을 상대하듯, 치열하게 싸우셔야 해요. 지금 흐르는 그 피는 한 번도 상처 입지 않은 몸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어머니가 상처 입은 곳은 옛 상처의 흉터 위입니다.
―세네카, 『철학자의 위로』에서
●슬픔이 사라지길 기다릴 것인가 사라질 날을 만들 것인가, 선택하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 앞에서 충분히 애도하는 기간을 가져야, 그것이 문득 고개를 드는 트라우마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계속해서 슬픔에만 매몰되어 자기 인생을 나락으로 내몰아서는 안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지내며 즐거웠던 순간들, 어린 시절 사랑스러운 재잘거림과 지적인 성장기는 돌아보지 않고 사건의 마지막 모습만 움켜쥐고” 있는 것을 지속해서는 안 된다. “슬픔이 사라질 날을 기다리기보다 사라질 날을 직접 만들어야” 한다.
“고통에게 스스로 안녕을 고해야” 한다. “어떤 감정이든 이성에 굴복하면 영원히 진정되기” 때문이다. “고통을 속이기보다 끝내는 쪽을” 택하라! 그 한 가지 방법으로서, 세네카는 “학문으로 눈을 돌리시라.”고 조언한다.
또한 세네카는 과거의 즐거운 기억을 떠올리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이는 과거에 집착해서 보상을 얻으려는 의도가 아니다.
모든 즐거움은 우리를 빨리 떠나가고 흘러가고 지나치고, 오기도 전에 대부분 사라집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은 과거를 봐야 하고, 과거에 우리가 즐겼던 것들은 무엇이든 다시 불러와야 하고, 이것을 자주 생각하며 자세히 살펴봐야 합니다.
―세네카, 『철학자의 위로』에서
“슬픔에 빠진 사람은 흔히 사랑하는 것에서 멀어지고 슬픔을 위한 자유를 원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슬픔의 상황에 갇혀 있지 말고 미래를 재구성하기 위해 과거를 소환하라는 요구다. 자연은 우리에게 ‘소유권’을 준 것이 아니라 ‘이용권’을 준 것이다. 내 곁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의 소유가 아니다. 우리가 한껏 품고 맘껏 사랑하다가 자연 곁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존재들이다.
●누군가에게 일어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준비하라!
세네카는 인간이 통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불행이 일어나기 전에는 아무것도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신은 결코 불행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남들보다 평온한 길로 나아갈 뿐이지 자신과 남들 모두에게 사고가 일어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태어나는” 순간에 “이미 선고된” 것이다.
우리의 집 앞으로 그토록 많은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데 우리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요. 그토록 많은 가슴 에이는 장례식이 있지만,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어른이 될 날을, 우리는 군 복무와 선대로부터의 유산 상속을 마음속으로 고민합니다.
―세네카, 『철학자의 위로』에서
그런데 “우리가 당하는 것이 그렇게 뜻밖의 일일수록 우리가 더욱더 몰락하는 것은 필연적이기” 때문에, 세네카는 이렇게 조언한다. “발생할 거라고 두려워하는 일이 반드시 발생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야 암울한 상황이 실제로 왔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 분석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면, 그만큼 공포심을 줄일 수 있다는 뜻이다. 놀라운 인사이트다. 20세기에 프로이트가 주장했던 트라우마 치료 방법을 이미 고대 로마에서 세네카가 주장한 것이다.
불의의 습격을 당하는 자들에게 운명은 무거운 것이지만, 늘 기다리는 자는 쉽게 견디는 법입니다.
―세네카, 『철학자의 위로』에서
●죽음을 기억하자 끝은 정해져 있다
마지막으로 기억할 것은 끝이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세네카는 “삶이여, 내가 너를 이기는 것은 죽음의 호의 덕분이다.”라고 강조한다.
죽음은 포로가 된 자의 족쇄를 풀어줍니다. 죽음은 능력이 부족한 권력이 가둔 자들을 감옥에서 꺼내 줍니다. 죽음은 추방당해 늘 조국만 생각하며 그쪽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어디서 죽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평등하게 되돌려 놓습니다.
―세네카, 『철학자의 위로』에서
세네카는 “저마다의 끝은 정해져 있다.”라고 말한다. 더 오래 살았을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의 짐을 이제 내려놓아야 한다. “노인이나 이미 내리막에 있는 사람”만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젊든 늙든 간에 우리 모두는 “이미 죽음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으며, 오래가는 것들이 있을 뿐”이다. “각자 생을 마감하는 시기는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같은 곳을 향해 나아간다.”
그 끝은 처음 놓인 그대로 머물 것이며, 어떤 노력과 영향력으로도 뒤로 밀리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당신의 아들은 계획된 대로 삶을 마쳤다고 여기세요. 그는 자신의 수명을 지녔으며, “그리고 정해진 시간의 목적지에 이르렀습니다.”
―세네카, 『철학자의 위로』에서
끝으로 세네카는 우리 모두에게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사유하는 철학자가 되길 권한다. 우리 곁을 떠난 사람은, “영혼을 묶은 사슬이며 그림자일” 뿐인 육체의 집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그렇게 “혼란스럽고 잡다한 것들을 떠나 순수하고 빛나는 것에 도달하는” 그때가 바로 ‘영원한 안식’이다. 아직도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이제 그만 무너진 마음을 추스르고 회복하자.
세네카의 글은 회복의 근본적인 방식이 바로 이성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철학자의 위로』는 매우 귀한 독서가 될 것이다. “이성이 하지 않으면 운명은 결코 우리의 눈물을 그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읽고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번역자는 작품 해설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위로는 위로하는 자의 의도가 아니라 위로받는 자의 마음으로부터 생겨난다. 세네카의 말은 오래전에 살았던 마르키아, 헬비아, 폴뤼비우스를 가리키며 시작되지만, 그 위로의 끝은 이 글을 읽는 새로운 독자들의 마음이 될 것이다.
―이세운, 『철학자의 위로』 해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