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표한 시인 허연의 빗나간 문장과 빛나는 생각
다르게 흘러온 자만이 쓸 수 있는 신비로운 아포리즘
1995년, 무명의 젊은 시인이 발표한 첫 시집이 청춘들 사이에서 불꽃처럼 번져 나간다. 그 시집의 제목은 불온한 검은 피. 지금도 문청들은 이 검은 시집을 읽으며 불온한 피를 수혈받는다. 그러나 누구도 더 이상 그의 시를 보지 못했다. 그는 한 권의 시집만을 남기고 사라지는 듯했다. 또 다른 시집으로 돌아온 그가 피의 건재함을 확인시켜 주기 전까진. 그로부터 10년 만에 출간한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는 말 그대로 화려한 복귀작이었다. 중년의 방황을 담은 이 시집은 평단과 대중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 시인을 상징할 페르소나를 선사하기도 했다. 나쁜 소년. 이후 허연은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 미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등 새로운 시집을 출간할 때마다 특유의 슬픔과 허무로 점점 더 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으며 독자적이고도 독보적인 존재가 되어 갔다. 그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독자는 이제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이미지는 여전히 신비와 베일이 아닐까. ‘나쁜 소년’ 허연의 산문집 『너에게 시시한 기분은 없다』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너에게 시시한 기분은 없다』는 시 쓰는 일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허연의 첫 자전적 에세이다. 등단 이래 20여 년 동안 산문집을 출간한 적은 있었지만 대체로 고전 작품에 대한 안내서이거나 고전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해설서 성격의 책이 대부분이었다. 이 책에는 지난 십수 년 동안 신문 칼럼, 잡지, 소셜 네트워크 등 여러 매체들에 쓴 아포리즘과 길고 짧은 산문들을 선별해 수록했다. 그의 삶이 흘러온 내력을 보여 주는 동시에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노력한 또 하나의 내력을 보여 주는 글들이다. 다른 시공간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쓰인 글들을 모아 주는 키워드는 ‘기분’이다. 삶의 기쁨과 슬픔, 사랑과 이별을 통해 경험한 그리움과 회한, 예술 작품을 보면서 경험한 황홀과 경이, 낯선 여행지를 거니는 동안 발견한 외로움과 고독, 세상을 향한 냉소와 비판,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감동과 경외. 한마디로 이 책은 허연을 구성하는 이성과 감성의 총체를 보여 준다. 그리고 이 총체적 기분들은 우리 자신의 기분들과도 무척 닮았다.
시시한 날씨는 없다. 다른 날씨가 있을 뿐이다. 기분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시시한 기분은 없다. 다른 기분이 있을 뿐이다. 흐르는 강물이 한순간도 제자리에 멈춰 서 있지 않은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다. 우리는 매 순간 다른 기분으로 살아간다. 그 많은, 숱한 기분들의 총합이 바로 나의 삶이자 당신의 삶이며 지금의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기분의 총합이다. 우리의 삶이 하나의 예술품이라면 지금의 ‘나’를 만든 그 모든 기분들을 소중하게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나’라는 작품을 위한 미학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기쁘고 슬픈, 그립고 후회되는, 황홀하고 경이로운, 두렵고 무서운,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기분들을 겪고 견디며 점점 더 깊은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가장 예술적인 관점이다.
■ 기쁨과 슬픔
그는 쓴다. “인간의 진실은 슬픔에 더 가깝다”고. 하지만 그는 이렇게도 쓴다. “기쁨과 슬픔은 나도 모르는 사이 자리를 바꾸어 앉았다”고. 그러니 둘을 구분하려는 모든 시도는 헛수고이거나 결국 헛수고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많은 슬픔을 견뎌야 하지만 그 슬픔의 진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1부에서는 기쁨과 슬픔 어느 한쪽으로 환원할 수 없는 생의 순간들에 대해 기록한다.
■ 그리움과 회한
시간이 휩쓸고 간 자리엔 그리움이 남는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느 봄날에 대한 추억,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친구와 보냈던 한밤의 열정…… 그러나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모두가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움은 그저 주어지는 시간의 부속물이 아니라 시간을 거스르는 자만이 성취할 수 있는 의지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 그리움의 목록을 늘어뜨린다. 2부에서 시인은 그리워했던 순간들을 그때 그 순간처럼 떠올린다.
■ 황홀과 경이
예술 작품과 만나는 격렬한 순간에 우리의 내면은 변형된다. 허연의 삶을 연대기로 표기하면 중요한 구간들에는 다음과 같은 항목들이 올지 모른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앞에서 말문을 잃었던 날, 권진규의 조각을 보며 본질만 남은 인간의 형상을 봤던 날, 손상기의 「공작 도시」 앞에서 전율했던 날, 에릭 사티의 음악을 듣고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보며 영혼의 각도가 반쯤 이동했던 날…… 소년이었을 때부터 미술 잡지를 끼고 살았던 허연에게 새로운 예술가를 발견하는 일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했다. 일상이 줄 수 없는 황홀한 순간을 안겨주는 예술과의 만남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존재를 꿈꾸게 하는 유일한 스승일지도 모른다. 3부에서는 예술 작품 앞에서 경험한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을 다룬다.
■ 여행과 외로움
스물일곱 살, 두 사람을 떠나보낸 후 그는 한국을 훌쩍 떠난다. 몇 번이나 울었던 실크로드의 길들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순하고 슬픈 사람들이 먼저 떠오르는 스리랑카, 눈이 시려서 눈물이 나는 『설국』의 고장 에치고유자와, 공기마저도 아름다운 곳 부에노스 아이레스, 광기와 사랑을 같은 뜻으로 쓰는 곳 안달루시아, 길고 느렸던 나일강의 추억. 4부에는 여행지에서 만난 낯선 기분들을 담았다. 인간은 외롭다. 그리고 여행은 자신의 외로움과 마주하는 일이다.
■ 냉소, 그리고 단독자
그럼에도 사람들이 허연에게서 맨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냉소와 비딱함이 아닐까. 그의 칼럼을 읽어 온 독자들이라면 그가 쓰는 지성과 논리의 언어에 더 익숙함을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을 향한 냉소와 사유의 색ᄁᆞᆯ이 돋보이는 5부는 무리 짓기를 누구보다 싫어하고 만장일치라면 도망부터 치고 보는 그의 ‘불편한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글들로 구성되었다. 경직된 내면에 숨통을 틔워 주는 글들이기도 하고 우리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삐딱함에의 욕망을 건드리는 글들이기도 하다.
■ 경외
6부의 제목은 ‘무너지는 사람이 아름답다’이다. 6부에서는 그가 존경했던 삶들을 관통하는 경외감이 두드러진다. 살면서 한 번쯤 존재만으로도 빛이 나는 아름다운 사람을 만난다. 혹은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들은 무너져도 아름답다. 무너질 수 있었기에 아름답다. 허연의 마음에 두려울 정도로 아름다워 보였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들을 떠올렸던 순간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 마음속에도 그들을 향한 경외감이 물드는 것 같다.
허연은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자신의 삶에 깊이 각인된 어느 영화의 대사를 인용한다. “모두들 어쩌다 지금의 자신이 되지.” 그렇다. 우리는 모두 어쩌다 지금의 자신이 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당신이 ‘읽는’ 것은 지금의 허연을 만든 기분들일 테지만, 이 책을 읽으며 당신이 ‘만나는’ 것은 지금의 당신을 만든 수많은 기분들일 것이다. 그 책의 목록은 전혀 다른 순서와 구성으로 채워질 것이다.
■본문에서
“강물에게는 과거를 묻지 않는 미덕이 있다. 자기를 찾아온 모든 것들을 묵묵히 바다로 나를 뿐. 왜 왔는지,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는다. 그저 모든 것을 바다로 가져갈 뿐이다. 강물은 칭찬을 들을 때나 비난을 들을 때나 한결같다. 묵묵히 도시를 가로질러 갈 뿐이다.” (37쪽)
“나무들은 서 있는 자리를 바꿀 수 없는 숙명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허락된 정식 간격을 지키기 위해 생장을 포기하는 순교마저도 서슴지 않는다. (중략) 나는 가까이 다가와서 몸을 기대고 속삭이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보다는 서로의 경계를, 사람 사이의 비무장지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람들이 좋다.” (38쪽)
“캄캄한 세상을 가르는 밤기차의 불 켜진 창은 하나 하나가 스크린이다. 스크린 안에는 때로는 가슴 아픈 사연이 때로은 기쁜 사연이 들어 있다. 승리한 자가 등장하기도 하고, 실패한 사람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움의 드라마가 펼쳐지기도 하고, 미움의 드라마가 펼쳐지기도 한다. 밤기차의 불 켜진 창은 생의 스크린이다.” (67쪽)
“아픔의 무게를 논하는 사람은 하수다. 아픔은 오로지 아픈 사람의 것이기에 절대적이다. 다른 사람은 절대로 나 대신 아파할 수가 없다. 각기 다른 사람이 겪는 아픔의 경중을 논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다. 사람들은 누구나 최선을 다해 아프고 있다.” (85쪽)
“사랑은 가녀린 것들을 ‘힘’이 있는 존재로 거듭나게 해 준다. 약하기 그지없던 것들이 사랑의 자기장에 들어온 순간 강한 것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억세고 강한 것들은 힘을 잃는다. 이미 ‘힘’이었던 것들은 무엇인가에 길들여지듯 순해진다. 강한 것들과 약한 것들이 자리를 바꾸는 일. 그것이 사랑의 역사다.” (91쪽)
“갇혀 있는 사람은 편지를 많이 쓴다. 그들은 그리움이라는 무기를 들고 생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태도로 세상과 접촉한다. 그것이 갇힌 자들의 편지쓰기다. 탄식과 슬픔이 담장을 넘어가지만 밖에서는 천천히 아이들이 자라날 뿐이다.” (118쪽)
“시는 내게 밥도 돈도 직업도 계급도 환희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한참을 도망치다가 문득 돌아보면 시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120쪽)
“우리가 어느 봄날의 햇살을 보고 감탄을 한다는 것은,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북반구 다른 나라에 사는 누군가와 기쁨을 함께 나누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143쪽)
“우리는 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아프다. 우리는 타인에 대해서 결코 가능하지 않은 꿈을 꾸면서 인생을 소비한다. 누군가 나를 기다려줄 것이라는 미망, 누군가 나를 결코 버리지 않을 거라는 미망, 내가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미망. 여행은 이런 어둡고 어리석은 미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 준다.” (182쪽)
프롤로그
1부 기쁨과 슬픔은 나도 모르게 자리를 바꾸어 앉았다 13
2부 누구나 최선을 다해 아프다 83
3부 사랑스럽고 초라한 지구를 거니는 일 143
4부 예외의 날들이 시작됐을 때 시를 쓰기 시작했다 183
5부 오늘 벌어진 일 다 진화다 243
6부 무너지는 사람이 좋다 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