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가치는 이해하는 자의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
일일교사로 초청된 열다섯 명의 직업인,
검은 욕망을 품은 하얀 거짓들
제22회 김준성문학상, 제7회 젊은작가상 등을 수상하며 그 개성을 인정받은 소설가 김솔의 신작 장편소설 『부다페스트 이야기』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순례자 개개인의 이야기를 모아 중세 영국의 생활상을 입체적으로 보여 준 고전소설 『캔터베리 이야기』의 형식을 오마주한 『부다페스트 이야기』에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소재의 한 국제 학교의 연례행사에 초청된 일일교사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행사를 준비하는 내내 학교 측은 출신 국가나 부모의 재력 등 외부적 요인으로 아이들을 차별하지 않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행사 기획 의도와 수업 내용을 그대로 읽어 내자면 ‘완벽한 교육 소설’일 수도 있었을 『부다페스트 이야기』가 책을 덮고 나면 왜 ‘낯 뜨거운 욕망의 소설’이 되는지 궁금하다면 이제 그 이야기들을 한 편 한 편 읽어 낼 차례다.
■제48회 인터내셔널 데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위치한 세인트버나드 국제 학교. 세계 각지의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드는 이 국제 학교에서는 매년 9월 마지막 주 수요일마다 ‘인터내셔널 데이’라는 행사가 열린다. 타 학교에서 그 진행 방식을 배워 갈 만큼 행사는 높은 명성을 누리고 있다. 메인 프로그램은 한 직업을 대표할 만한 성취를 이룬 주요 인사들을 일일교사로 초청해 벌이는 직업 체험 수업이다. 학생들에게 그 어떤 차별적 언행도 주입시키지 않기 위해 일일교사들은 옷차림, 언행, 수업 내용 등 모든 면에서 각별한 주의를 요구받는다. 주요 인사들이 학교 측의 까다로운 요구 사항을 기꺼이 수용하는 것은 일일교사로 초청받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와 무게를 가지는지, 초청받은 이력을 발판 삼아 더욱 부유해지고 저명해질 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름답고 정의로운 가치들로 포장된 인터내셔널 데이라는 무대 바깥, 구성원들의 뒤섞인 욕망을 바라보는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인터내셔널 데이는 다시 쓰인다. 다시 쓰인 인터내셔널 데이는 곧 『부다페스트 이야기』가 되어 우리 앞에 놓인다.
■당신의 진짜 마음은 무엇인가요?
인터내셔널 데이에 초청된 군인, 요리사, 보험 설계사, 패션 디자이너 등 일일교사 15인의 삶은 제각각이다. 각자 헤쳐 온 역경도, 누리고 있는 명성도, 하고 있는 일도, 오랫동안 품어 온 사명감도 모두 개성이 뚜렷해 같은 날 진행된 수업이라기에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부다페스트 이야기』의 화자는 이들 삶이 보이는 다양성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펜을 겨눈다. 그리고 묻는다. “그래서 당신의 진짜 욕망은 무엇인가요?” 각자의 삶이 얼마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지와 관계없이 욕망의 모습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욕망 앞에서 벌거벗은 그들이 꼭 같은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기가 무섭게, 그 깨달음은 작품 밖으로 향한다. 우리도 자신의 진짜 욕망을 마주한다면 그 모습이 과연 그들의 민낯과 다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제자리를 찾아온 이야기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가 순례 여행 중 나눈 모든 희로애락을 집대성한 책이라면, 김솔의 『부다페스트 이야기』는 제48회 인터내셔널 데이라는 무대를 둘러싼 모든 욕망들을 모아 둔 책이다. 욕망 앞에서 비슷한 얼굴들은 곧 지금, 여기, 우리 주변의 군상들, 그리고 나의 이야기와 같다. 이 책이 “지금 여기 대한민국의 독자들에게로 제자리를 찾아온” 작품이라는 소설가 최정화의 말처럼 『부다페스트 이야기』는 곧 지금, 여기, 대한민국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요리사의 이야기」는 세상 모든 요리사들의 이야기가 되고, 「군인의 이야기」는 세상 모든 군인들의 이야기와 같아지는 마법. 준비가 됐는가? 이제 욕망으로만 가득 찬 판도라의 상자를 열 차례다.
■본문에서
48회 인터내셔널 데이 행사가 열리던 9월 마지막 수요일 아침의 하늘은 두꺼운 구름으로 뒤덮여 어둡고 무거워 보였으나 일기 예보와 달리 비를 뿌리지는 않았다. 예상치 못한 사건들 때문에 매년 곤욕을 치렀던 교사들은 미묘한 이상 징후에도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행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언행들을 최대한 자제했다. 두 달 동안의 노력이 행사 당일의 날씨 때문에 의미를 잃게 되는 경우를 상상하는 건 끔찍했다.
―「프롤로그」에서, 28~29쪽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회당 부근에서 작은 프랑스 식당을 운영하는 요리사는 어느 날 저녁 찾아온 손님들이 세인트버나드 국제 학교의 인터내셔널 데이 행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부다페스트에서 성공한 자들만이 그 행사의 일일교사로 초대받는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낀 요리사는 이 손님들이 다시 자신의 가게에 나타나길 기다렸다가 평소보다 훨씬 공들여서 요리한 음식을 식탁까지 직접 들고 날랐다. 음식에 대한 평가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요리사의 이야기」에서, 75쪽
부자는 자신의 참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자들이 학교 안팎에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주목을 끌지 않기 위해 행사 당일의 옷차림과 액세서리를 세심하게 선택했고, 강의 원고를 변호사와 함께 검토했으며, 고급 승용차를 지하철역에 세운 뒤 학교까지 걸어왔다.
각별한 주의에도 교문 앞에서 교장이 그를 직접 맞이하는 바람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주목을 받았다. 교장실로 안내되는 것을 거부하고 일일교사 대기실로 곧바로 들어오긴 했으나 그를 알아본 교감이 급히 건넨 방석과 물수건, 커피를 무심결에 받아 들면서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부자의 이야기」에서, 328쪽
■추천의 말
코로나와 기후 위기의 시대, 우리들은 낯선 불행 앞에 던져져 있다. 강연자들이 계속 반복되는 전쟁과 학살을 경험하면서도 허위로 앞을 보지 못하고 제 욕심만 차리는 것처럼, 그러는 사이에 어떤 방식으로든 폭력에 가담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가 처한 불행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전염병의 원인과 긴밀하게 연루되어 있다.
—최정화(소설가)│추천의 말에서
김솔은 각각의 직업에 몸담고 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어떻게 의미화하는지 그리고 그 의미화 과정 속에 어떤 환상을 작동시키며 자신들의 세계를 합리화하는지를 파고들어 보여 준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단지 직업에 관한 이야기는 아닌 셈이다. 직업과 접속해 있는 개인의 기묘한 욕망, 사회체제의 우스꽝스러운 역학 관계, 역사의 아이러니 그리고 그것들과 동시에 연동 중인 우리들의 편견과 무지, 차별 의식 등을 이 소설은 카드처럼 만지작거리며 우리를 바라보고 섬뜩하게 웃고 있는 듯하다.
—송종원(문학평론가)│추천의 말에서
프롤로그 9
군인의 이야기 49
요리사의 이야기 73
의사의 이야기 101
엔지니어의 이야기 125
지워진 이야기: 여행가의 이야기 147
패션 디자이너의 이야기 157
공무원의 이야기 179
건축가의 이야기 197
영화배우의 이야기 207
첼리스트의 이야기 227
지워졌다가 복원된 이야기: 종군기자의 이야기 241
축구 감독의 이야기 251
보험 판매원의 이야기 269
초대받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 287
변호사의 이야기 311
부자의 이야기 325
에필로그 337
작가의 말 345
추천의 말 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