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베르메르를 알게 된 것은 ‘진주 귀걸이 소녀’를 영화로 보면서부터다. 그 당시는 나에게 너무나도 낯선 화가였다. 이후 영화의 원작을 읽으면서 이 작가에 대해 관심이 생겼고, 몇 편의 소설이나 그에 대한 글들로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가끔 여기저기에서 만나는 그의 그림들은 나에게 즐거움을 주었고, 다시 영화나 소설 등에서 만난 그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우광훈을 처음 만난 것은 ‘플리머스에서의 즐거운 건맨 생활’이란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이었다. 서부영화의 기초 위에서 만들어진 이 소설이 재미와 기발한 상상력으로 미묘한 울림을 주었다. 그래서 다른 작품집인 ‘유쾌한 바나나 씨의 하루’를 읽었고 그 속에 담긴 기발한 상상력을 다시 즐겼다. 하지만 왠지 아쉬움이 남았다. 그 당시 읽은 다른 작가들의 소설이 강한 인상을 주고 다음 작품을 찾아 읽게 만드는 반면에 그는 약간 그 자리에 멈추게 만들었다. 물론 이것은 그의 새로운 소설들이 많이 나오지 않은 것도 이유지만 취향에 꼭 맞지 않은 것도 원인이다.
최근 알게 된 거장 화가와 기발한 상상력을 보여준 작가의 조합은 이 소설을 선택하는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생각과 달리 소설은 거장의 위작을 만든 가브리엘 이벤스라는 인물의 이야기였다. 대단한 위작을 만들어낸 이 화가의 생애를 따라 그 당시 유럽을 재현해 내고 있다. 가브리엘은 천부적인 데생 실력을 가졌지만 창조성이 조금 결여되어 있다. 아니 정확히는 시대를 잘못 태어난 것이다. 새로운 사조들이 끊임없이 태어나던 그 시기에 그의 사실적인 화풍은 유행과 맞지 않았다. 이런 시대적 현실과 갑자기 커지기 시작한 미술 시장을 배경으로 이야기는 나아간다.
사실 첫 부분은 조금 밋밋한 느낌을 주었다. 현실의 모습과 가브리엘이 네덜란드에서 국보급 그림을 나치에게 판매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어린 시절의 그를 묘사한 이야기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별다른 긴장감을 주지도 못하고 이 소년의 이야기가 그냥 무난한 정도였다. 하지만 중반에 가면서 자신이 위작을 했다고 말하는 장면부터 긴장감을 심어주었다. 이후 그가 어떻게 위작을 그려내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파리의 모습과 그의 삶은 빠르게 빨려 들어가게 만들고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드는 재미가 있다.
소설을 읽다 만나는 가브리엘은 불쌍한 인물이다. 대단한 능력을 가졌지만 시대와 화상들을 잘못 만난 것이다. 그 뛰어난 재능은 다른 방식으로 더 발전할 수 있었지만 시대의 유행과 화상들의 꼬드김과 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자신의 길을 잃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재능은 다른 곳에서 피어났다. 당시 새롭게 발견된 화가 베르메르의 작품을 통해서다. 전문가들도 모두 속아 넘어갈 정도로 그의 위작은 새로운 베르메르의 모습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그린 위작을 나치가 구입하고, 이 사실 때문에 그가 검사에게 기소당하는 현실이다. 위작을 만들어 나치에게 판매하게 된 이유를 보면 애국자로도 불러도 문제가 없을 정도지만 너무나도 뛰어나기에 위작이란 사실을 감정단이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베르메르의 작품 수는 너무 적다. 명성과 고가에 거래되는 현실을 생각하면 뛰어난 위작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장은 많은데 공급이 부족한 현실에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감정서까지 곁들여진다면 더욱 유혹적이다. 수집가들은 이럴 모아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고, 화상은 이 거래를 통해 부를 쌓게 된다. 자본주의 생리에 의해 엄청난 금액으로 거래되고 부풀려지는 현실에선 더욱 이런 위작들이 생길 수밖에 없지 않을까.
지금도 곳곳에서 위작으로 의심받고 위작을 진품처럼 걸어놓고 사람들에게 걸작이란 이름으로 강요한다. 1억 달러가 넘는 그림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본래의 취지를 넘어 상업화로 진흙탕이 되어가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그림을 그린 화가보다 그 유통되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부가가치가 창출되는 현실은 뒤틀린 사회의 한 모습이 아닌가 한다. 이런 고가 미술품을 구입하는 것을 나같이 돈 없고 그림에 대해 문외한은 생각도 할 수 없다. 아마 다른 이들처럼 나도 재테크로 그림을 소장한다면 다른 이야기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