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라고 선언하기까지

줄거리도 잘 모르고 산 책이었는데, 알고 보니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담긴 책이었다. 주인공 지넷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그녀가 성장하는 과정을 다룬 이야기였다. 지넷은 어릴 때부터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자랐다. 그녀의 어머니는 굉장히 종교적이었고 지넷을 입양해 신에게 바칠 아이로 키우고자 했다. 그래서 지넷의 삶은 당연하게 종교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다른 아이들과 학교에서 생활하면서 지넷은 자신이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하지만 그녀는 종교를 중심으로 하는 삶에 의문을 갖지 않는다. 그저 당연히 그런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런 지넷의 삶에 멜라니가 등장하면서 그녀의 삶은 뒤바뀐다. 지넷은 멜라니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와 교회는 발칵 뒤집어지고 만다. 동성애는 금기였기 때문이다. 교회는 지넷과 멜라니가 일종의 ‘퇴마의식’을 받고 회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순간부터 지넷은 자신의 삶과 종교에 의문을 갖게 된다. 지넷은 자신의 마음은 정화되어야 할 종류의 욕망을 품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멜라니를 향한 마음은 순수하고 깨끗한데, 어째서 이게 더러운 것으로 여겨져야만 하는지 질문한다. 하지만 교회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빨리 회개시켜야 한다고만 말한다. 지넷은 회개한다고 할 때까지 방 안에 갇히게 된다. 계속해서 의문을 갖는 지넷은 이때부터 오렌지색 악마를 보게 된다. 악마는 그녀가 갖고 있는 많은 질문들을 물으며, 그녀가 알고 있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들을 해준다.

 

왜 하필이면 오렌지색 악마였을까? 지넷에게 오렌지는 종교, 그리고 어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어머니는 오렌지만이 과일이라며 지넷에게 늘 오렌지만을 준다. 지넷의 세계는 늘 오렌지였다. 종교와 어머니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 오렌지가 지배하는 세계. 이 세계에서 지넷은 부여받은 역할대로만, 순종하는 딸이자 독실한 신자로서만 살아가야 했다. 오렌지의 세계에서 왜?라는 질문은 없었다. 명령에 대한 거부도 없었다. 하지만 오렌지색 악마가 나타난 순간, 지넷은 더 이상 이 오렌지의 세계에 머무르지 못한다. 의문을 갖게 되고, 순종을 거부한다. 자신만의 역할을 직접 찾기 시작한다.

 

회개한다고 말한 뒤 방에서 나오게 된 지넷은 멜라니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의식 후에 자신의 세계에 의문을 갖게 된 지넷과는 달리, 멜라니는 완전히 둔하고 무감한 사람으로 변하고 만다. 그전에 갖고 있던 감정들은 자기 것이 아니었다는 듯한 태도로 평면적인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이전의 모습을 잃어버린 멜라니는 지넷에게 오렌지를 권한다. 지넷은 그 오렌지를 거부한다. 그녀는 지금의 안정감을 위해서 자신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

 

지넷은 다시 교회에 받아들여져 다시 원래의 생활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녀가 또 다시 여성과 사귀자 교회와 어머니는 그녀를 내쫓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지넷은 표면적인 평화를 얻고 자신의 진짜 모습을 버리느니, 자신의 모든 감정과 생각을 그대로 갖고 지금 자신이 속한 세계를 벗어나기로 결정한다. 오렌지만이 과일인 세계를 떠나,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닌 세계로 나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렇게 지넷은 성장한다. 자신이 속한 세계의 편협함을 벗어나 더 큰 세상을 구경하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지넷은 이제 용감하게 선언한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라고.

 

이 책에는 독특하게도 동화 같은 이야기들이 중간에 삽입되어 있다. 동화처럼 환상적이면서도 기묘한 분위기를 띤다. 얼핏 보기에는 지넷의 이야기와 별 상관이 없고 뜬금없이 등장해 흐름을 깨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지넷의 현재와 연결된다. 지넷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동화 같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내 지넷이 지금 어떤 삶의 변화를 겪고 있는지 설명해준다. 예를 들어, 지넷이 집을 떠나야 할 때에는 오랫동안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인물이 나오는 동화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 환상적인 이야기들은 지넷의 이야기가 쉬이 잊히지 않도록 한다. 그녀의 삶에 동화적인 요소를 더한다. 현재의 지넷이 시련을 맞닥뜨리고, 그 앞에서 저항하고, 끝내는 이겨내는 것을 동화에 녹여낸다. 이 이야기에서 동화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현재에 환상적 요소를 더해 써낸 것이다.

 

책의 마지막에서 지넷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어머니는 그녀와 함께 식사를 하고 선물을 뜯고, 평범한 크리스마스를 맞는다. 그리고 어머니는 지넷에게 스쳐지나가듯 이야기한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라고. 이 말은 어머니의 변화를 의미한다. 오렌지만이 과일이라 선언하고, 동성애자인 딸을 부정하던 어머니는 이제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라고 인정하고, 딸의 모습을 그저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 지넷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동안, 지넷의 어머니도 변화한 것이다. 책은 지넷이 자신이 한 선택을 돌아보는 것으로 끝난다.​

 

나는 이곳에 결코 있지 않았으나 나의 모든 부분들이 내가 한, 그리고 하지 않은 모든 선택들과 함께 흐르며 한순간 서로 스치게 될 가능성이 있다. 내가 여전히 북부에 사는 전도사이면서 동시에 달아난 사람일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잠시 동안 이 두 자아가 융합되었을 것이다. 시간에 있어 나는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후퇴하지도 않았다. 시간을 가로질러 나였을 수도 있었던 사람으로 간 것이다.

 

지넷 윈터슨,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pp. 280-281

 

지넷은 자신의 과거도, 현재도 부정하지 않는다. 종교를 중심으로 살아갔던 지넷도,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려고 달아난 지넷도, 그래서 지금 있게 된 지넷도 모두 지넷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지넷들이 현재의 지넷을 만들었다. 오렌지만이 과일인 세상과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닌 세상 모두가 지넷을 만들어냈다. 그 모든 세상을 거쳐 지넷이라는 인물이 만들어졌기에, 지넷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받아들인다. 그게 바로 자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