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런 회환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섬 』을 열어 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라고 서문을 장식한 알베르 카뮈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며 책장을 열었다. 이거 그러니까 안본눈 삽니다 라고 울부짖는 덕후 뭐 이런거지 카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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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스승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장 그르니에의 산문집 “섬”을 읽었다. 쉽게 읽히는 책은 아녔는데, 차분하고 잔잔하고 금욕적인 문체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면서 한문장 한문장 여러번 반복해 읽게 되고, 독자로 하여금 사색하게 하는 매력이 있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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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물루”를 제외하면 전부 낯선 곳, 그 중에서도 섬에 관한 글이 대부분이다. 완벽하게 이해하진 못했지만 다 읽기 전부터 재독할 책 목록에 넣어놨을만큼 좋았다. 날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여행지의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펼치고픈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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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27 ?공(empty)의 매력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면 삶은 비극적인 것이다. 바싹 가까이에서 보면 삶은 터무니없을 만큼 치사스럽다. 삶을 살아가노라면 자연히 바로 그 삶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절대로 그런 것 따위는 느끼지 않고 지냈으면 싶었던 감정들 속으로 빠져들게 마련이다. 이것이 저것보다 더 낫다고 여겨지는 때도 있다. ‘이것’과 ‘저것’ 둘 중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경우도 있다. 아니라고 말해 봐야 소용이 없다. ‘그렇다.’라고 나는 말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야말로 고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자신도 모르게 ‘무심’의 순간에서 ‘선택’의 순간으로 옮겨 가게 된다. 나는 유희에 말려들고 덧없는 것 속에서 거기엔 있지도 않은 절대를 찾는다. 입을 다물고 무시해버리는 대신 나는 마음속에 소용돌이를 계속 불러일으키고 있다. 상표가 서로 다른 두 자루의 펜을 놓고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실로 참혹하다. 가장 좋은 것이 반드시 가장 비싼 것은 아닐 터이니 말이다. 가장 못한 것이 오직 다르다는 이유로 널리 쓰일 수도 있다. 가장 좋은 것도 없고 가장 못한 것도 없다. 이때에 좋은 것이 있고, 저 때에 좋은것이 있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란 없음을 나도 잘 알지만 이 세상에 일단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이 세상 속에 일단 얼굴을 내밀기로 작정만 하면, 우리는 더할 수 없을 만큼 기묘한 악마의 유혹을 받게 된다. 목숨이 붙어 있는데 왜 안 살아? 왜 제일 좋은 걸 안 골라? 하고 귀에다 속살거리는 그 악마 말이다. 이렇게 되면 곧 뜀박질을 하고 여행을 떠나고 그러나 ‘이제 막’ 욕망이 만족되려고 하는 순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인가.

P.053 ?고양이 물루

우리가 어떤 존재들을 사랑하게 될 때면 그들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어찌나 많은지, 그런 것은 사실 우리 자신에게 밖에는 별 흥밋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제때에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보편적인 생각들만이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들이라야 이른바 그들의 ‘지성’에 호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나 슬프게 하는 것 쪽을 더중시하는 까닭도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 이유다. ” 그 사람은 늘 가장을 하고 연기하나요?” 어떤 사람이 찰리 채플린에 관해 이런 질문을 했다. 그러나 가장을 하고 연기하는 쪽은 채플린이나 돈키호테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다. 도대체 어떻게 고양이 따위에 흥미를 느낄 수가 있을까, ‘문제’ 속에서 살고 정치, 종교, 혹은 그 밖의 ‘사상’을 가진, 사유하고 추론하는 인간에게 그런 따위의 주제가 합당하기나 한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제발 사상을 좀 가져 봐요! 그렇지만 고양이는 존재한다. 그 점이 바로 고양이와 그 사상들 사이의 차이점이다.

P.087 ?케르겔렌 군도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쪽만 보여 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 우리는 추론을 통해서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노동으로 살아가야 하는 개인들 – 그러니까 거의 모든 사람들 – 에 대하여 사회가 요구하는 바는 너무나 잔혹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단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물론 혁명에 대한 희망 이외에) 그것은 병에 걸리는 일뿐이다. 우리를 위협하는 질병과 사고가 그렇게도 많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놀란다. 그것들이 그렇게 많은 까닭은 매일매일의 노동에 지쳐 버린 인간들이 그들의 남아 있는 영혼을 구해내고자 할 때 찾아낼 수 있는 것이 기껏해야 질병이라는 저 한심한 피난처뿐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병이란 여행과도 같은 것이며 병원 생활이란 그 나름의 으리으리한 고대광실 생활이다. 만약 부자들이 그걸 알았다면 가난한 사람들이 병에 걸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비참 속에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시련들 속에서, 만사에 대하여,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 회의를 느낄 때, 바로 그때 우리는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는 어떤 현실과 접촉하게 된다. 우리가 혼자 살다가 혼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 생각하면 심장이 멈춰 버릴 것만 같다. 부조리한 직분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는 반항심을 불러 일으킨다. 러시아 사람들이 태형과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얻어 낸 안이한 효과에 매달리는 대신 우리가 비밀과 궁핍 속에 은신했을 때 우리는 ‘치욕을 통하여 영감을 얻어야 한다.’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P.120

섬들을 생각할 때면 왜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 일어나는 것일까? 난바다의 시원한 공기며 사방의 수평선으로 자유롭게 터진 바다를 섬 말고 어디서 만날 수 있으며 육체적 황홀을 경험하고 살 수 있는 곳이 섬 말고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섬에 가면 격리된다(isolé).’ – 섬의 어원 자체가 그렇지 않은가? 섬, 혹은 ‘혼자뿐인’ 한 인간. 섬들, 혹은 ‘혼자씩일 뿐인’ 인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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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그르니에를 번역하여 한국에 처음 소개하게 된 김화영 선생님의 역자후기 또한 재미있다. 선생님은 사람들이 “썩지 않는 비닐로 표지를 씌운 가벼운 책들을 쉽사리 쓰고 쉽사리 빨리 읽고 쉽사리 버린다”며 아름다운 글은 드물다며 아쉬워 하셨는데, 그래서 민음사에선 새 번역판을 내면서 코팅이 안 된 종이질감의 표지를 채택한 것일까? 이건 저만의 뇌피셜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