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나 시를 즐겨 읽는 분들이 심심찮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책 말미에 독자의 자유로운 해석을 방해하는 해설을 싣지 않았으면 좋겠다’, ‘해설-비평이 작품보다 어려워서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같은 것들이다. 항간에서는 비평가들의 문체를 ‘보그병신체’에 빗대 ‘인문병신체’라 부른다. 요는 말은 말인데 말 같지 않은 말이라는 말이다. 비평은 독자들을 대화의 장으로 초대하지 못하고 요상한 독백으로 남는다. 한동안 잠잠했던 문단권력 논쟁은 신경숙 표절사건 이후 수면 위로 부상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중에서도 출판사의 이권을 지키는 데 봉사하는 주례사 비평에 대한 쓴소리가 높았다. 비평가(대학교수)-주류(메이저) 문예지- 거대 출판사의 공모관계를 지적하며 이 트라이앵글이 한국문학(특히 소설)의 창의성을 고사시키는 주범이라고 비판들 앞에 그렇다면 ‘정녕’ 비평/가의 임무, 역할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독일 최고의 비평가를 자청했던 발터 벤야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의견을 제공하는 대신, 위대한 비평가는 자신의 비평적 분석을 토대로 다른 이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한다. 나아가 이러한 비평가의 모습에 대한 정의는 개인적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되며, 가능한 한 객관적이고 전략적인 문제가 되어야만 한다. 비평가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것은 그가 무엇을 표상하는가이다. 그는 이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어야만 한다.’ 또, 발터 벤야민에 대한 본인의 책에서 이글턴은 비평가의 임무를 이렇게 정의한다. 사회주의 비평가의 주된 임무는 대중의 문화적 해방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작가 위크숍과 민중극을 조직하고, 공공 디자인과 건축에 관여하는 등의 행동을 예로 들었다(실제로 인문360° 등을 통해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 선생님들을 보면서 힘을 많이 얻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비평가의 진정한 임무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상태라고 말한다. 이는 대중의 문화적 해방이 제도적 개혁 따위로 한순간에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매순간 현재를 덮쳐오는 미래, 미래에서 불어오는 진보의 폭풍을 포착해 사건적 시간을 지속시키는 일이 비평가의 임무라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글턴은 리비스주의자들이 말하는 꼼꼼한 작품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문학이라는 틀 안에 문학적인 것, 인문 정신을 가둬두는 것을 경계한다. 결국 인간을 이해하는 일과 사회를 바꾸는 일이 별개의 작업이 아님을, 비평가는 개인의 특수성을 이해하려는 문학에서 사회를 본질적으로 바꿀 수 있는 진보의 보편적 이미지를 해석하고 담론을 생산해내는 사람임을 이글턴은 이 책 전반에 걸처 소개된 자신의 치열한 삶과 성실한 저작 작업들을 통해 우리들에게 확인시켜주고 있다.